기록하지 않은 기억

2025-04-15

달리기를 한 지 몇년 됐다. 신던 운동화로 뛰다가 러닝화를 샀고, 앱을 설치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몇㎞를 몇분에 뛰는지 평균 속도를 관리하면서 동기부여가 되고 뛰는 거리가 늘고 속도가 빨라졌다. 1년이 지난 후 스마트워치를 사서 차고 나간 다음에는 몸이 더 가벼워지고, 심박수까지 관리가 되면서 더 많은 기록을 축적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 기록이 기억이 되기 시작했다. 앱을 켜지 않고 뛰다가 한참 후 알게 되면 망연자실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이미 숨을 헐떡이고 있지만, 기록은 남지 않은 것이니 사실상 뛰지 않은 것이다. 기록이 없으면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겨울에 실내 러닝으로 전환하면서 두 번째 문제가 생겼다. 러닝머신 위에서 설정한 속도에 맞춰 달리면 정확한 거리와 시간이 화면에 나온다. 그런데 스마트워치를 차고 뛰어보니 머신의 기록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5㎞를 뛰었는데 워치는 아직 4.5㎞밖에 안 된다. 속도를 높이면 격차는 더 커졌다. 이제 그만 뛰고 싶지만 매번 계획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수백m를 더 뛰는 일이 생겼다. 운동을 많이 해서 뿌듯하기보다 매번 손해를 보는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결국 남는 것은 워치로 연동한 기록이니 어쩔 수 없었다. 어떤 기록이 진짜 기록이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지?

사진을 찍는 듯한 세심한 기억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기억은 언제나 불안정적이다. 재생과 녹화 버튼을 동시에 누르는 것과 같다. 회상을 하면서 신경망의 연결은 느슨해지고, 동시에 들어오는 정보들로 재연결을 하면서 조금씩 과거 기억은 바뀌어간다. 미국 에머리대학에서 학생들에게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사건 다음날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했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기록하게 했다. 2년 반 뒤 같은 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고, 대답한 내용을 처음의 기록과 비교해보았다. 두 기억이 정확히 일치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5%는 모두 틀렸다. 학생들은 워낙 대단한 사건이었기에 생생하게 잘 기억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처음 기록을 보여주자 지금 기억이 더 정확하다고 우기면서 당황해했다. 기억은 이토록 불안정한 것이었다.

기록이란 최대한 기억을 잘 보존하고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록이란 것은 잊어버리고 틀릴지 모른다는 불안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 이면에는, 기록해놓은 것은 정확하다는 가정이 있다. 하지만 경험한 전체 사건 중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일부뿐이다. 여행 사진을 찍으면 그 장면과 관련한 정보 중심으로 기억에 남고 그 외의 일들은 상대적으로 기억에 남지 못하고 사라진다. 찍은 사진이 다르면 같이 여행을 가도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

덕분에 우리는 기록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의존하게 되는데, 문제는 기록을 제대로 남겨야만 한다는 두 번째 불안이 생기는 것이다. 기록을 잘 관리하면 더 이상 무방비 상태에서 허둥지둥 기억의 옷장을 뒤적이지 않아도 되니 안심이 된다. 마치 법과 규칙을 만드는 일이 매번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을 수 있게 하고, 함께 살아가며 이래도 되는지 뭘 하면 되고 안 되는지 고민하고 불안해하지 않게 해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기록과 규칙에 집착하게 되면 두 번째 불안이 더 강해지고 막상 이걸 왜 시작했는지는 잊어버리고 만다. 추상적이고 실체가 없는 불안한 마음만 가득할 수도 있다. 나도 기록을 정확히 남겨야 한다는 2차 불안이 커지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기분이 좋아지려 규칙적으로 운동한다는 처음의 목적을 쪼그라뜨려 잊게 만들었다.

기록은 무엇이 더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뛰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두 번째 불안에서 벗어나 기록을 하는 목적의 본질에 집중하자는 다짐을 해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오랜만에 뛰러 나가볼까 한다. 아뿔싸, 워치가 방전돼 있다. 의욕이 훅 사그라들어 버렸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