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전사’ 영치금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2-06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던 1995년 11월 말의 일이다. 원래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수감자 가족 등이 영치금 전달을 위해 구치소 민원실 앞으로 몰려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 구속 이후 면회 신청자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노 전 대통령과 그 가족 및 측근의 일거수일투족을 점검하려는 신문사 기자 및 방송사 카메라가 구치소 앞에 잔뜩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얼굴이 찍혀 저녁 뉴스 화면에라도 나가면 주변에서 ‘앗, 너한테 죄 짓고 감방에 있는 지인이 있었어’라는 질문을 받을 게 뻔했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영치금이 들어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재소자들 사이에 “‘범털’(노 전 대통령처럼 지체 높은 죄수) 때문에 괜히 우리 같은 ‘개털’(평범한 죄수)만 피해를 본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현금 쓸 일이 거의 없는 요즘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테지만 교정당국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재소자들을 위한 영치금을 현금으로 받아 왔다. 그런데 2019년 전남 지역의 한 교도소에서 교도관이 영치금을 횡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재소자 가족 등이 맡긴 영치금을 빼돌려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고 장부에는 제대로 전달된 것처럼 기록하는 수법으로 무려 3억3000만원의 부당 이득을 챙긴 교도관이 적발된 것이다. 해당 교도관은 2016년부터 3년 가까이 이런 짓을 저질러 왔지만 윗선에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를 계기로 법무부는 이듬해 3월 영치금 관리 시스템을 전면 개편했다. 현금을 싸들고 와서 교도관한테 건네는 행위를 완전히 금지하고 재소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가상 계좌를 계설해 입금하도록 했다. 진작 이뤄졌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국혁신당 조국 전 대표의 부인 정경심씨는 자녀의 입시 비리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래 꽤 오랜 기간 교정시설에 갇혀 시간을 보냈다. 그가 서울구치소에 있던 2021년 1월부터 2023년 2월까지 2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영치금으로 받은 돈만 2억4000만원이 넘는다니 ‘이 정도는 돼야 범털 소리를 듣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이 막 시작된 2020년 5월 법무부는 영치금이 채 3만원도 안 되는 재소자 1만2700여명에게 빵과 과자 등 부식류를 지급한 적이 있다. 당시 법무부는 “영치금이 없을 때 겪는 곤란은 바깥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며 감염병 유행 때문에 가뜩이나 곤궁한 수용자들의 처지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아무리 평등이 강조되는 세상이라고 해도 범털과 개털 간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12·3 비상계엄 사태를 주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19일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로 구속된 피의자들을 ‘애국 전사’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영치금을 보낸 사실이 5일 알려졌다. 이들은 서부지법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에 반발해 법원 청사에 난입하고 각종 기물을 파손했다. 이미 60여명이 붙잡혀 사법부 판단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도 김 전 장관은 “이분들의 구국 정신과 애국심은 오래오래 기억돼야 할 것”이라고 강변하니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윤 대통령의 구속 및 탄핵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지 여부는 명백히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사법부를 공격하고 물리적 훼손을 가하는 행위는 완전히 별개 문제다. 김 전 장관에게 ‘애국’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할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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