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리걸테크 기업에 49.8억달러, 한화로 자그마치 7조30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이 투자됐다. 이는 2021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조사를 실시한 글로벌 리걸테크 기업 렉시스넥시스가 운영하는 법률 미디어 서비스 '로360펄스(Law360 Pulse)'는 기록적인 투자의 배경을 생성형 인공지능(AI) 등장으로 법률 산업의 혁신 가능성에 대한 높은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AI 기술이 업무 자동화를 넘어 문서 검토, 분석, 초안 작성 등 법률 업무 전반에 걸쳐 생산성 향상을 이끌어 내며 리걸테크 산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생성형 AI 기술로 리걸테크 입지 강화
최근 몇 년 전만 해도 리걸테크 기업에 대한 투자는 경기 침체와 법률 산업 내 높은 규제 장벽 등으로 위축된 상태였다. 흐름을 단숨에 반전시킨 것은 2022년 말 생성형 AI 기술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신기술은 법률 분야로 보폭을 넓히며 변호사의 업무 생산성과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글로벌 리걸테크 기업들은 발 빠르게 생성형 AI 기반의 서비스를 출시했고, 시장 입지를 강화하며 굵직한 투자 유치를 이뤄냈다.
미국 리걸테크 스타트업 '하비(Harvey)'는 챗GPT 기반의 법률 AI 서비스 '하비 AI'를 개발하며 지난해 7월 1억달러(약 1460억원) 규모의 시리즈C 투자를 유치했다. AI 기술로 법률 문서 분석 및 초안 작성 서비스 고도화에 집중하는 하비는 지난해 연간반복매출(ARR) 4배 성장을 기록했고, 런던 사무실을 개설해 유럽 시장으로 사업 확장을 추진 중이다. 활발한 기술 투자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하비는 올해 2월, 30억달러(약 4조4000억원)로 기업 가치를 인정받으며 3억달러(약 4380억 원) 규모의 시리즈D 투자유치 소식을 발표해 리걸테크 업계에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영국 리걸테크 스타트업 '로하이브(Lawhive)'도 4000만달러(약 590억원) 규모의 시리즈 A 투자 소식을 알렸다. 로하이브는 변호사의 법률 업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AI 서비스 '로렌스(Lawrence)'를 개발한 곳이다. 해당 서비스는 영국 변호사시험(Solicitors Qualifying Exam:SQE) 1차 합격선인 정답률 55~60%를 뛰어넘는 74%를 기록할 정도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고객 비용을 최대 50%까지 절감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변호사를 위한 법률 AI 보조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웨덴의 리걸테크 스타트업 '레야(Leya)'는 지난해 5월과 7월, 두 차례나 투자 유치에 성공하며 업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투자 규모는 각각 1050만달러(약 154억원), 2500만달러(약 368억 원)에 이른다. 레야는 독일, 핀란드, 노르웨이, 스페인, 스웨덴 등 다양한 국가의 로펌에서 그 소프트웨어를 채택하며 법률 업무 혁신을 이끌고 있다.
◇법률 산업에서 AI의 역할
업무 생산성을 높이며 법률 산업에서 발전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AI 기술에 대해 변호사 업계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AI 기술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변호사 업계에서는 변호사 중심의 생태계 조성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법률 전문가의 업무를 보조하는 도구로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AI 기술을 법률 실무에서 활용하는 과정에서 변호사의 전문성과 책임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 및 연수, 프로그램 개발 지원 등을 통해 변호사가 AI 기술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리걸테크 생태계가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발전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다. 그래야 업계와 기업이 상생하며 산업이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해외에서는 기술 활용에 그치지 않고, 직접 AI 서비스를 만드는 리걸테크 기업에 투자하며 상생을 꾀하는 로펌들이 출현하고 있다. 미국 로펌 순위를 매기는 'Am Law 200'에서 지난해 19위를 차지한 '쿨리(Cooley LLP)'는 투자 펀드와 제휴해 지난해 7월 AI 기반 변호사 근무 시간 기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인트원(PointOne)'에 투자했다. 포인트원은 AI를 활용해 변호사의 근무 시간을 추적하고, 청구서 검토를 자동화하는 서비스 개발 회사로 쿨리를 포함해 여러 투자사로부터 350만달러(약 51억 원) 규모의 시드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Am Law 200'에서 35위에 선정된 '윌슨 손시니 굿리치 앤 로사티(Wilson Sonsini Goodrich & Rosati)'는 법률 문서 작성 스타트업 '클리어브리프(Clearbrief)'의 투자사로 이름을 올렸다. 해당 로펌을 포함해 다수의 투자사로부터 400만달러(약 58억원)의 투자를 유치한 클리어브리프는 변호사의 법률 문서 작성을 돕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애드온 AI 서비스를 제공하며, 법률 콘텐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AI 에이전트로 새로운 패러다임 등장
2022년 말부터 생성형 AI로 전 산업이 들썩였다면, 지금은 보다 발전적인 형태로 진화한 'AI 에이전트'라는 개념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AI 에이전트는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데이터를 수집, 사용하여 사전에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을 스스로 결정해서 수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주어진 질문에 최적의 정보를 찾아 똑똑하게 답하는 생성형 AI에서 나아가 차원이 다른 자율성으로 스스로 일하는 AI 에이전트는 법률 분야에서도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대량의 텍스트로 구성된 법률 문서를 분석하거나 복잡한 사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 AI 에이전트 기술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최근 오픈AI가 공개한 딥리서치(Deep Research)도 방대한 정보를 종합해 여러 단계에 걸친 작업을 수행해주는 AI 에이전트의 일종이다.
국내에서도 AI 에이전트를 법률 분야에 활용하는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국내 최초 법률 AI 비서 서비스 '슈퍼로이어'를 선보인 로앤컴퍼니는 법무법인 화우에 구축하는 '법률 사건 분석' 서비스를 개발 중이다. AI 에이전트 기반으로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사건 기록을 업로드하면 알아서 분석해 사실 관계와 쟁점 그리고 초기적인 솔루션을 대시보드로 제공하는 서비스다. 자료 분석이 미리 돼 있어 사건에 대한 질문에 신속한 답변이 가능하고, 변호사가 필요로 하는 작업을 예측해 관련 문서 초안 작성 후 변호사에게 검토 받는 기능까지 발전시킬 수 있어 한층 높은 업무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다. 해당 서비스는 로앤컴퍼니와 업스테이지가 공동 개발한 한국어 및 한국 법률에 특화된 자체 거대언어모델(LLM)을 활용하며,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AI 법률 보조 서비스 확산 사업자'로 선정돼 법률가의 워크플로를 고려한 AI 에이전트 서비스로 고도화를 진행 중이다.
◇국내 리걸테크에 놓인 도전과 기회
이제 AI 기술은 리걸테크 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생성형 AI로 시장 성장 가능성을 입증한 글로벌 리걸테크 기업들은 진화된 기술로 더 큰 효용을 제공하며 지속가능한 발전 토대를 마련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도 AI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이에 국가 차원에서 국내 AI 산업 발전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방안은 논의 중이고, 특히 법률 분야에서는 AI 활용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실질적인 지원책 마련이 절실하다. 업계와 상생하며 시장에 안정적으로 생태계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AI 기술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도 해당 기술이 지닌 성장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도록 국내에서도 속도감 있는 의사결정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리걸테크 기업 역시 글로벌 흐름에 발맞춰 기술 혁신과 서비스 고도화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올 한 해는 정부 정책의 지원과 업계 협력, 기술 혁신이 어우러져 K리걸테크에도 글로벌 시장 못지않게 훈훈한 소식들이 많이 들려오길 기대해 본다.
정재성 로앤컴퍼니 부대표·공동창업자 js.jung@lawcompany.co.kr
〈필자〉 고려대에서 산업공학과 금융공학을 전공으로,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졸업 후 약 3년간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앤드컴퍼니'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근무하고, 법률서비스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변화를 일으키고자 2012년 김본환 대표와 '로앤컴퍼니'를 창업했다. 현재 로앤컴퍼니는 국내 1위 법률서비스 플랫폼 '로톡'을 비롯해 법률 정보 검색 서비스 '빅케이스', 국내 최초 법률가용 AI 어시스턴트 '슈퍼로이어' 등 법률서비스의 대중화와 선진화에 기여할 서비스를 다양하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