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을 불신으로 바꾸지 않으려면

2025-01-26

“정치가의 주요 기능은 실망을 주는 거예요.”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에서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핀치의 냉소적인 이 말이 우리가 목도하는 정치인과 정치 행태를 한 줄로 명징하게 요약한 동시에, 정치나 정치인에 대한 어쭙잖은 희망은 접어두라는 충고로 들려서다.

약속과 기대는 실망을 부르는 주문이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정치인은 약속과 기대를 남발한다. 사실 누구든지, 뭐든 꼬시려면 조금은 달콤한 무언가를 내걸어야 한다. 그러니 정치인이 유권자에게 실망을 안기는 것은, 핀치의 표현대로라면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일 수밖에 없다.

그 필연적 수순에도 단계와 강도가 있다. 약속을 지켜도 실망은 생긴다. 약속과 기대를 둘러싼 양측의 온도 차 때문이다. 온도 차가 클수록 실망의 강도도 세진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원하는 것을 얻은 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먹튀’는 죄질이 가장 나쁘다. 익히 당해온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는 순간으로, 실망의 강도는 세다. 실망을 건너뛰고 당혹과 불신의 영역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약속의 퍼즐이 어긋나거나, 말 바꾸기라는 ‘학습 효과’가 고개를 들 때다.

지난 23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은 어그러진 퍼즐을 맞춰야 하는 믿음의 문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이념과 진영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며 민간이 주도하는 친기업 성장론을 주장하며 현실적 실용주의를 천명했다. “기업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이고, 일자리는 기업이 만들고 기업의 성장 발전이 국가 경제의 발전”이라고 했다. “민간의 전문성과 창의성을 존중하고, 기업을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하고, 기업 활동 장애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 대표의 이런 노선 전환이 반가워야 하지만, 반색해야 할지는 아직 애매하다. 이 대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헷갈리는 것투성이라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난 20일 민주당이 발표한 ‘제2차 민생입법과제’만 봐도 기업은 당혹스럽다. 올해 당론으로 추진할 10가지 입법 과제에 포함된 ‘중간착취 방지 4법’(근로기준법 개정안·파견근로자보호법 개정안·사업이전 근로자보호법 제정안·건설근로자고용개선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노란봉투법’ 등 야당의 각종 입법 전횡 속 모래주머니에 더해 쇳덩이까지 주렁주렁 달릴 판이다.

그 중 ‘사업이전 근로자보호법 제정안’은 기업의 인수·합병(M&A) 등 사업 재편 과정에서 기존 근로자 고용 승계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기업 합병과 분할, 영업 양도 과정을 노동조합에 먼저 통보하고 직원에게 사실상 ‘비토권’을 부여하는 내용도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의 매각이나 구조조정이 어려워지거나 불가능해질 수 있다. 근로자 보호를 위해 과도하게 사적 자치와 계약자유의 원칙을 침해하는 것이다. 조금 심하게 가정하면, 기업 입장에서 이래저래 매각과 구조조정 등이 여의치 않으면 회사 문을 닫는 수밖에 없다.

기업의 경영이나 영업 비밀도 과도하게 침해해 기업 입장에서 난감한 법안도 여럿이다. 민주당이 당론으로 추진하는 ‘파견근로자보호법’ 개정안에서는 파견근로자가 파견업체 사업주에게 전체 도급비 중 인건비 비중과 파견수수료 등을 알려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부여했다. 파견사업주의 ‘중간착취’를 막기 위해서라지만 경영계는 “사업주 사이의 계약 내용을 모두 공개하라는 의미”라며 걱정이 태산이다.

야당이 추진하는 ‘국회증언감정법’에 대한 경영계의 우려는 더 크다. 국회가 기업 등에 서류 제출이나 출석을 요구하면 개인정보 보호나 영업 비밀 등을 이유로 거부할 수 없다. 기업 기밀이나 핵심 정보도 예외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국회가 부르면 기업 총수와 최고경영자(CEO)는 해외에 있건, 병원에 있건 무조건 출석해야 한다. 국정감사와 조사뿐만 아니라 상임위 안건 심사나 청문회까지 가야 한다.

반면 기업 활동 지원을 위해 산업계 등에서 요청하는 법안 처리에 야당은 미적지근한 태도다. 연구개발 종사자의 ‘주 52시간 적용 예외’를 담은 반도체특별법 처리를 미뤄왔다. 전력망 확충과 고준위 방폐장법 등 ‘첨단산업 에너지 3법’은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탈이념’과 ‘탈진영’을 내세운 이 대표의 진심을 증명하는 길은 행동이다. 기업이 중요하다며 기업 옥죄기를 이어간다면, 실망을 불신으로 만드는 패착일 뿐이다. “기업이 중요하다고 하니 정말 그런 줄 알더라”라고 할 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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