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카와 카즈미(67·알비온 아트 대표)는 카타르 국왕의 사촌 셰이크 하마드 빈 압둘라 알타니,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고 윈저 공작 부인과 더불어 세계 4대 보석 컬렉터로 손꼽힌다. 201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더 보디 트랜스폼드’ 전시회와 2019년 파리 반클리프 아펠 ‘라클로쉬’ 전시회 메인 스폰서였으며 보석의 문화유물적 가치를 널리 알렸다는 점을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의 컬렉션 800여점 중 엄선한 200여점이 한국을 찾았다.
전시 준비차 한국을 방문한 아리카와 카즈미를 지난 5일 서울 롯데뮤지엄에서 만났다. 세계 최대의 보석 컬렉터라는 타이틀처럼 화려한 거부(巨富)의 이미지를 기대했으나, 그는 마치 사제복을 연상시키는 절제된 차림으로 나타났다. 사연이 많은 보석 이야기를 할 때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사색에 빠지는 듯도 했다.
아리카와는 역대 최대 규모 소장전의 장소로 왜 한국을 택했을까. 그의 입에서 ‘구다라(6세기 <일본서기>에서 백제를 일컫는 명칭)’라는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젊은 시절 2년간 승려로 지낸 그는 신앙심이 깊은 불자로 불상 수집에도 조예가 깊다. 그는 “보석을 보는 눈은 불상을 보는 눈에서 비롯됐다”고 밝히곤 했다.
“6세기 백제(구다라)의 성왕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을 소개했다는 유력한 설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우리는 역사적으로 한국에 큰 은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죠. 제가 1억분의 1이라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제 컬렉션을 한국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더군요.”
아리카와는 전문적으로 보석 공부를 한 적은 없다.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출신으로 1981년 어머니가 운영하던 후쿠오카의 ‘주얼리 아리카와’의 수입 업무를 맡으며 업계에 발을 디뎠다. 영국 런던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뮤지엄의 주얼리 갤러리에서 보석에 눈을 떴다는 그는 여느 보석 컬렉터와의 차별점으로 역사적, 문화적, 미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소장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가 보석을 보는 기준은 단 하나다.
“보석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이 얼마나 떨리는가’ 그것뿐이에요. 수억엔짜리 보석이라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가격이 비교적 저렴해도 떨림과 감동이 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볼 때도 외모나 이력이 아닌 만난 순간의 ‘오라(Aura)’를 느끼고 인연을 맺는다고 말했다. ‘그 느낌’만으로 세계적인 보석 수집가가 될 수 있었을까? 성공한 보석 딜러가 된 좀 더 현실적인 비결이 궁금했다. 거듭된 질문에 그는 “마음에 드는 작품은 남보다 비싸게 사들이는 것”이라며 비교적 납득하기 쉬운 답을 줬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보석을 비싸게 사들여야 ‘저 수집가는 네고(협상) 없이 바로 산다’ 혹은 ‘시세보다 비싸게 산다’라는 소문이 전 세계로 퍼져요. 그때부터 좋은 작품이 저에게 모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물건을 쉽게 그리고 비싸게 팔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결혼 예물이나 특별한 기념일에 루비나 에메랄드같이 화려한 색깔의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주고받는 문화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보석의 소장 욕구는 예전 같지 않을지 몰라도 ‘007’이나 ‘오션스’ 시리즈처럼 세계 희귀 보석을 둘러싼 범죄를 그린 케이퍼무비는 여전히 인기다. 40년 ‘업력’의 아리카와는 손님들에게 영 인기 없던 한 카메오 펜던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 중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세족식 그림이 담긴 카메오 펜던트를 80만엔(약 800만원)을 주고 소장했어요. 종교적인 그림이 그려진 보석은 요즘 여성들이 선호하지 않아 판로가 넓지 않지만 저는 강한 끌림을 느꼈죠.”
마침내 한 유명 의사의 부인이 펜던트를 구입했는데, 그만 남편에게 들통이 나 한 달 만에 ‘환불’했다. 이후 펜던트는 20년 넘게 그의 소장품으로 남아 있었다. 그동안 여러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했으나 결과는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17세기, 누군가는 19세기 근대작이라고 했다.
“저는 분명 그 펜던트에서 중세의 기운을 느꼈거든요. 그러다 이번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영국 미술사학자 다이애나 스카리스브릭에게 감정을 의뢰했고, ‘축하합니다! 14세기 진품 카메오 펜던트입니다’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현재 남은 것이 없는 유일한 귀중품이라고 하더군요.”
희귀 카메오 펜던트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카타르 국립박물관이 그에게 구입 의사를 밝혀왔다. 과연 가격은 얼마였을까? 그는 “매입 가격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금액’에 거래했다”고만 밝혔다.
현재 소장 보석의 규모를 묻는 말에도 그는 말을 아꼈다. 2년 전 한 외신은 당시 그의 소장품 가치가 5억달러(약 7000억원)라고 소개했다. 반짝이는 것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본 청동기 시대의 보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보석의 역사를 방불케 하는 그의 컬렉션 중 ‘핵심’이라 할 만한 소장품을 모은 이번 전시에서 꼭 눈여겨봐야 할 작품은 어떤 것일까.
아리카와는 100개가 넘는 핑크 토파즈가 사용돼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뷔르템베르크 왕실의 파뤼르(세트)’와 예수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바티칸이 인정한 성 십자가의 나뭇조각이 담긴 르네상스 거장 발레리오 벨리의 ‘CROSS’를 추천했다. ‘CROSS’는 런던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뮤지엄과 바티칸 사크로 박물관 소장품을 비롯해 세계에 단 3점만 남아있다. ‘아리카와 컬렉션’ 소장품은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세계적인 건축가 구마 겐고가 디자인한 전시회 공간은 오롯이 보석에 집중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그중 아름다움을 넘어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티아라 섹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리카와는 보석 수집 초창기에 티아라 수집에 열중해 티아라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급상승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330년에 만든 올리브 황금 왕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인장 반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포르투갈의 스테파니 여왕에게 선물한 팔찌,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보석 컬렉션 등 보석의 개념을 확장할 수 있는 역사적인 유물도 있다. 아리카와는 “보석이 주는 생명의 빛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보석을 보고 그 느낌을 머리나 설명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지 우주의 기원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본질, 그 존재 자체를 맛보고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디 아트 오브 주얼리(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은 내년 3월16일까지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