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공장·저수지…가치있는 그들의 도전정신

2024-10-15

(236) 인물과 효행의 마을 -효돈(신효)의 역사문화를 찾아서

④ 지형을 활용하고 개척한 선인들

닥밭·닥구통·책판고·저지리 등 단어에 남은 인쇄 문화 흔적

논농사 어려운 지형임에도 저수지 조성하며 쌀 생산 노력

▲신효동 종이공장 터에서 제주의 인쇄문화를 생각하다

신효마을에는 특이한 지명이 더러 남아있다. 비가 올 때마다 물이 고인다 해서 ‘물진밭(水進田)’, 지형이 말발굽과 비슷하다 해서 ‘말축밭(馬足田)’, 설촌 초기 문씨·송씨·허씨가 살았다 해서 ‘문개동산·송개동산·허개동산’, 기와(瓦)를 구웠다 해서 ‘왜통밧’, 닥나무 재배하던 밭인 ‘닥밭’, 자그마한 닥밭들이 있던 ‘닥돌래와 닥낭밭’ 등의 지명은 물론 가마솥에서 삶은 닥나무 껍질을 웅덩이에 넣고 여러 날 물에 불려 수제로 종이를 만들던 넓은 바위인 ‘닥구통’도 있다.

정감 어린 지명에 그 유래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해방 후 새로운 문물을 접한 신효동 사람들은 위의 지형 및 환경적인 특징과 배경 아래 공장을 짓고 종이 생산을 시도했으나 채산성이 떨어져 공장경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태 남아있는 종이공장 담벼락과 돌담은 문방사우를 가까이 하던 신효마을 선비들의 흔적이라고나 할까.

제주 곳곳에는 닥나무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은 편인데 그중 하나가 ‘책판고’라는 서고와 ‘저지리’라는 마을 이름이다. 저지마을과 책판고가 의미하는 것은 제주에서도 닥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생산하고 서적을 만든 인쇄 문화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우수한 인쇄문화를 지닌 나라다. 통일신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출판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낳았으며 고려는 금속활자를 발명했고 조선에서도 많은 활자를 개량해 인쇄 문화를 꽃피웠다.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인 고려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의 책판(冊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제주도에서도 일찍 책판에 의한 인쇄물이 발간됐다. 사단법인 한국고서협회에서 발간한 2023년 제주고서전에는 실물 대다수가 전해지지는 않지만 조선조 제주에서 판각한 책판 및 출판물 목록이 97권이나 소개되고 있다. 닥나무를 활용해 인쇄 문화를 꽃피운 제주 선인들의 흔적은 이곳 신효마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본인이 쓴 ‘제주도안내(濟州島案內)’ 속 닥나무

닥나무에 관한 기록은 일본인 아오야기가 1905년에 펴낸 ‘제주도안내’라는 책자에서도 확인된다. 1901년 이재수의 난 때 입도한 아오야기가 제주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아 쓴 책으로 당시의 제주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풍속이 소개되고 있다. 다음은 닥나무 재배에 관한 기록이다.

‘농업 부업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닥나무(楮) 재배라 한다. 닥나무는 전도 어디에서나 잘 자라며, 닥나무로 만드는 제지에 종사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제조법이 서툴러 단지 섬 안에서의 수요에 충당할 뿐이다. 근래 제주에 머물고 있는 일본인이 재배지를 확보하고 닥나무 종자를 일본 코오치(高知)현으로부터 들여와 재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다.’ 다음의 내용도 보인다. ‘평소 노도(怒濤)에 익숙해 거친 물결과 싸워온 도민들은 항해술이 능해 불안정한 고주(孤舟)를 조종하여 자유로이 대양을 횡단하고 물결 속을 출몰하여 대륙해안에서 항해의 파도를 타고 넘는다.’

▲1940년대부터 3만 평의 답에 논농사를 지은 신효마을

조상숭배에 남다른 풍속을 지닌 제주에서는 경조사를 지내기 위해 쌀을 생산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하천이 건천인 관계로 논농사가 이뤄지기에 적절하지 않은 지형·지질이다. 이러한 자연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선인들은 자체적으로 쌀(곤)을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제주도의 전체 경작지 중 1% 내외의 지역에서는 쌀을 생산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개척 농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중 하나가 신효동이다.

1932년 돈내큼(코)에서 5㎞의 상수도 철관을 연결해 수돗물을 공급했고 또한 돈내큼(코) 물을 효돈 넓은 들로 끌어내 10만여 평의 논밭을 조성하는 계획을 수립·추진했다. 1941년 수리조합을 결성해 공사를 하던 중 2명의 인부가 매몰되는 참사를 당해 중단했다가 공사를 재개해 저수지를 조성하던 가운데 광복을 맞았다. 이어 입도한 미군정이 시멘트 출하를 동결했으나 각고의 노력과 교섭을 통하여 시멘트 지원을 받음으로써 1947년 관계 사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질적 특징으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10만 평 넘는 논밭에 물을 댈 수 있도록 저수지와 수로를 설치해 놓았으나 막상 논농사를 시작해 보니 토양이 화산회토라 물이 쉽게 땅속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결국 저수지와 가까운 3만여 평의 논밭에서 벼농사를 짓기로 하고 나머지는 밭농사로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이고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 바닥을 찰흙으로 다지는 등 마을 선인들의 단결된 힘으로 이루어 놓은 결과치고는 기대에 못 미치는 작황이었다. 벼농사를 못 짓게 된 농가는 불만스러워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수익성이 좋은 고구마 재배와 감귤 과수원 조성으로 대체할 수 있어서 큰 피해와 갈등은 없었다.

1960년대 이후 감귤원 조성 붐으로 논농사를 하던 이들도 폐답을 하다 보니 수리조합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했다. 3000여 평에 이르던 저수지 일대에 감귤원이 들어선 지금 논밭과 저수지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그나마 상효 673번지 일대에 조성된 저수지 제방만이 1960~70년대 논농사의 흔적을 엿보게 할 뿐이다. 그래도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운 농경 사업에 발 벗고 나선 선인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어 역사문화의 선행과 가치에 절로 마음이 흐뭇해진다.

글·사진=김인석(신효동 노인회 부회장·㈔질토래비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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