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주인공, 계단식 성장, 라이벌의 존재, 멘토의 등장. 새롭게 보이던 이 모든 것들은 알고 보면 지금까지 성공했던 많은 작품들의 틀을 지금의 방식으로 세공한 것이었다. tvN 금토극 ‘정년이’의 인기 뒤에는 ‘여성 청년성장 서사’라는 검증된 이야기가 있었다.
‘정년이’는 최근 드라마 중반 이후의 서사에 돌입하면서 가파르게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 코리아의 집계에서 지난달 12일 첫 회의 시청률은 전국가구기준 4.8%, 수도권가구기준 5.7%를 기록했으나 4회 만에 둘 다 10%를 넘겼고, 지난달 27일 6회 방송에서는 각각 13.4%, 13.7%로 자체 최고치를 찍었다.
온라인 화제성 분야에서도 열기는 뜨겁다. 온라인 경쟁력 분석기관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이 발표한 10월 5주차, 최근 드라마 화제성 조사에서 ‘정년이’는 4주 거푸 1위에 올랐다. 출연자 화제성에서도 4주 연속 1위에 오른 윤정년 역 김태리에 이어 허영서 역 신예은(3위), 문옥경 역 정은채(4위), 홍주란 역 우다비(6위), 서혜랑 역 김윤혜(7위) 등이 줄줄이 상위권에 올랐다.
드라마 주요 장면, 특히 국극이 표현되는 장면에서의 동영상 클립 조회수도 높아 신예은이 방자연기에 몰입하는 장면이나, 지난주 방송된 윤정년의 득음장면은 순식간에 유튜브 조회수 100만건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서이레, 나몬 작가의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연재된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정년이’는 단행본 수 10권이 넘어가는 서사를 12회의 드라마에 축약하기 위해 서사의 곁가지를 대거 잘라내고 윤정년의 ‘성장 서사’에 집중했다. 극의 축이 되는 국극 장면과 성장 서사를 설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전 ‘여성 청년성장 서사’의 여러 작품들이 투영된다.
‘정년이’ 줄거리의 축은 가난한 시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우연히 천재적인 재능을 깨닫고 각고의 노력 끝에 경지에 오르는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러한 부분에서 MBC 드라마 ‘대장금’과 ‘선덕여왕’, ‘국희’ 등의 드라마가 떠오른다. ‘대장금’은 수라간 궁녀 출신으로 의녀 중에서도 최고의 반열에 오른 서장금의 서사를, ‘선덕여왕’ 역시 출생 직후 시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도피했다 향후 여왕의 자리에 오르는 덕만의 서사를 다뤘다. ‘국희’ 역시 부모와 헤어져 구박데기로 자라던 국희가 제과점을 통해 큰 사업가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드라마 평론가 충남대 윤석진 교수는 “이러한 ‘여성 청년성장 서사’의 주된 내용으로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주인공과 그 조력자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멘토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경쟁심을 올리는 라이벌의 존재도 있다”고 짚었다.
예를 들자면 ‘정년이’에는 주인공 윤정년(김태리)에 조력자 홍주란(우다비), 멘토 강소복(라미란), 경쟁자 허영서(신예은)가 있는 식이다. ‘대장금’에서는 서장금(이영애)에게 조력자 이연생(박은혜)과 노창이(최자혜), 멘토인 한백영(양미경), 라이벌 최금영(홍리나)이 있었다.
‘국희’의 경우도 주인공 민국희(김혜수)의 조력자 김상훈(정웅인), 라이벌 송신영(정선경), 멘토이자 스승 장태화(전무송)가 있었다. 비슷한 서사가 있는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경우에도 이러한 틀을 충실하게 따른다.
이러한 기본 틀 위에서 주인공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과제가 등장하고, 더 큰 과제가 등장하면 자신을 키워 문제를 해결하는 이른바 ‘계단식 성장’은 드라마의 동력이 된다. ‘정년이’의 경우 처음 보결 연구생의 신분으로 매란국극단에 들어간 정년은 정식 연구생, 이른바 ‘촛대’로 불리는 단역을 거쳐 ‘방자’ 정도의 조연 그리고 주연으로 올라가는 서사를 보여준다.
이 역시도 많은 청년성장 서사에서 보여준 부분과 비슷하다. 윤 교수는 “이러한 형식은 특히 ‘대장금’의 이병훈 감독이 ‘동이’ 등의 드라마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준 방식으로 인물의 성장과 함께 극의 몰입에 도움을 준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년이’가 다른 여성 쳥년성장 서사물과는 다른 점도 있다. 허영서 캐릭터가 단순히 윤정년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 ‘안타고니스트(반동인물)’의 입장에서 함께 성장하는 서사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최근 그의 실수를 정년이 만회하기도 하고, 정년의 실력에 감동하기도 하는 등 향후 화해의 여지를 남겼다.
정덕현 평론가 역시 비슷한 부분을 짚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경쟁 캐릭터는 서로를 짓밟으려는 서사를 보여주는데, 이 작품에서는 정년과 영서의 동반성장 서사가 등장한다. 이런 부분이 색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거기다 비주류인 국악의 서사 역시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최근 ‘민폐 논란’이 원치 않게 일었던 정년의 캐릭터성에 대한 차이도 있는데, 다른 성장서사의 주인공들과 다르게 정년의 경우 상황 전체를 판단하지 못해 주변에 폐를 끼치는 상황이 반복된다. 특히 군졸 역할을 할 때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는 연기로 전체 극의 흐름을 깨기도 했다.
윤 교수는 이에 대해 “이는 줄거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연출적인 문제로 보인다. 큰 원작서사를 국극과 성장으로 축약하면서 다른 서사를 대거 줄인 영향”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12부작으로 원작을 줄이면서 정년의 서사 외에는 남아있는 줄거리가 없어졌고, 모든 인물들이 다 정년이 만을 보고 정년이의 영향력에 예속돼 있다. 그렇다 보니 정년의 캐릭터가 필요 이상으로 튀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덕현 평론가는 “천재로 등장하는 윤정년이기 때문에 외부의 과제로 자신을 발전시키기 쉽지 않다. 결국 자신을 이겨야 하는데 이것이 ‘득음’ 에피소드처럼 자신을 딛고 이기는 느낌으로 그려지게 된다”며 “최근 젊은 세대가 각종 루틴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갓생살기’의 코드로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