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정복군주의 영토 확장, 오늘날 우리의 강역을 결정하다

2025-10-17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우리 역사에서 영토 확장을 이룬 정복 군주는 많지 않지만, 그 치세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에서 고대 왕국이 성립하던 시기에 영토 체계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기후 변화로 추위대가 남하하고 북방 민족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한반도·일본 열도·중국은 모두 그 영향권 속에서 영토의 확장과 축소를 겪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영토는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되었고, 이에 따라 고려 성종의 강동 6주 개척, 조선 세종의 4군 6진 개척 등 고토 회복의 노력이 이어졌다. 그 결과 현재 영토가 형성되었다.

고대 왕국 형성기의 정복군주, 근초고왕

고대 국가는 고구려 3세기 초 태조왕, 백제 3세기 말 고이왕, 신라 4세기 말 내물왕 시기에 형성되었다. 백제 고이왕(234~286)은 귀족을 관료로 편입시키고 율령을 반포했으며, 중앙에 6좌평과 16품의 관등제를 정착시켰다. 또한 낙랑을 공격하여 임진강 상류에서 평강-가평-여주-안성천을 잇는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무렵 전연의 모용씨(慕容氏)가 성장하면서 주변을 압박하자 부여족이 이동했고, 비류왕이 집권한 4세기 전반에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큰 변동이 일어났다. 서진은 흉노와 선비의 침략으로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났고(316), 고구려는 이 틈을 이용해 낙랑군과 대방군, 부여국을 정복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의 축출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영토 분쟁을 시작했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평양으로 천도하고 장수산성 부근에 남평양을 건설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양주도호부는 고구려의 남평양성 또는 북한산이라 불렸다. 이에 근초고왕은 대방군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3만 군사를 일으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남평양을 빼앗았다(371, 『삼국사기』).

또한 백제는 황주에서 신계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369년에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안성천의 목지국과 금강의 건마국을 정복하였다. 목지국 출신 목라근자와 왜의 아라다 와케는 마한을 장악하고 가야 7국을 평정했으며,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는 가야 전역에 군사를 주둔시켜 직접 통제하였다. 이 무렵 왜가 신라에 파병한 기록도 남아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

광개토대왕은 남쪽으로 백제의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북쪽으로 거란과 숙신(읍루)을 정벌했다. 동쪽으로 동부여를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서쪽으로 후연을 물리쳐 요동 반도를 장악했다. 즉위 초기에 백제의 주요 요충지를 빼앗았으며, 수곡성 전투(394)와 패수(예성강) 전투(395)에서 백제의 반격을 물리쳤다.

또 낙동강 유역의 백제 동맹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5만 병력을 보내 왜병과 구야국 세력을 물리쳤다(400). 그러나 요동 방면에서 후연의 침략이 발생하자, 남부 전선에서 철군하여 요동 일대를 공략했고(407), 이 전쟁으로 후연 세력이 요동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비(414)를 세우고, 남진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백제와 신라는 제나동맹(433)을 맺었고, 개로왕은 다각적인 외교로 대응했다. 그리고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고 한강 유역을 확보했다. 진흥왕의 배신으로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기면서 신라가 한강 유역 전체를 차지하였다. 신라 진흥왕은 대가야(大加耶)를 물리치면서 가야 지역을 정복하고, 북진하여 함흥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고려 성종의 강동 6주, 조선 세종의 4군과 6진의 개척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 일대는 발해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 요나라를 세운 뒤 발해를 공격하면서, 발해는 부여성 함락(925), 수도 상경성 함락(926)을 거쳐 결국 멸망하였다. 이로써 만주는 멀어지고, 우리의 국경은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되었다.

고려 성종 때 거란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993), 서희가 외교 담판을 벌였다. 그는 거란의 연호 사용·송나라 단교·조공 조건을 수용하는 대신, 고구려 옛 땅에서 여진을 몰아내고 고려가 압록강 하구 일대를 직접 통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 담판의 결과 고려는 ‘안북부에서 압록강까지 280리’의 점유를 인정받았고, 이듬해 여진을 소탕한 뒤 흥화진·용주·철주·통주·곽주·귀주를 설치했다. 현재의 평안북도가 바로 이 지역이다.

고려 후기 공민왕은 북진 정책을 통해 두만강 경계 지역까지 진출했고,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이 건국된 후 세종은 평안도에 사군을, 함경도에 육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연결하는 국경선을 확정했다. 세종은 백성들을 이주시켜 세제 혜택과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직접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했다.

우리 역사에서 시대별 영토 확장은 나라의 발전과 지속을 위한 강력한 지도자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되었다. 수많은 반대 속에서도 옳은 길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결정된 목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한 결과였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와 과제도 마찬가지다. 백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피며 고뇌했던 옛 정복 군주의 결단을 이해한다면, 해결의 길을 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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