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110주년…미공개 회의록으로 본 ‘위기극복 리더십’ 〈4〉

“각 업종을 통폐합하거나 경쟁을 제한하는 식의 행정 조치는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정책 입안자 입장에서는 통합이나 조정이 국가경제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장규모가 작다고 해서 정부가 나서서 ‘이 업종은 하나로 합치라’고 하게 되면 결국 기업은 국내시장에만 의존하게 되고 국제경쟁력은 영원히 갖출 수 없게 된다.”
“정부는 정부에 대한 찬사에 기뻐하기보다는 문제점을 제시할 때 이를 긍정적으로 점검해보는 냉철한 정책 태도를 가질 때 상호 신뢰를 조성하게 될 것이다.”
1982년 6월 14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특강 발언이다. 청자(聽者)는 부총리가 이끌던 5공화국 경제기획원의 간부들이었고 정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신분이었다. 불과 1년 반 전엔 권력 수뇌부로부터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았을 정도로 미운털이 박혔었다. 하지만 1년 여 후엔 ‘잘 나간다’는 경제 관료들에게 쓴소리를 하는 입장이 됐다.

정 회장과 전두환 정권은 이처럼 여러 차례 요동쳤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개발 체제이던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고 무력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극심했던 박정희 정권말의 최악의 경제 상황을 극복할 숙제를 떠안았다. 기업들의 과잉·중복…부실 투자도 난제 중 난제였다. 현대도 걸린 문제였다.
한때 “정치는 정치가가, 기업은 기업가가”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가 추진한 산업합리화 정책이 대표적으로, 과다 경쟁을 막는다며 자동차와 발전설비 분야도 각 1개사로 통합하게 했다. 정 회장에 따르면 “국보위나 전두환씨가 총을 가지고 정권을 뺏을 수는 있어도, 남의 재산까지 뺏을 순 없다. 공산주의를 하지 않는 이상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버텼지만,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발전설비를 포기했다. 국보위에선 현대가 발전설비를 택하도록 압박했지만 정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상처는 오래 갔다. 정 회장은 회고록에서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1전 한 푼 못 건지고 창원 중공업 공장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시간은 잊히지가 않는다. 전쟁만큼은 아니지만, 자격이 없는 이들의 손에 쥐어진 권력이라는 칼날 아래 기업을 하면서 정변 때마다, 정권 교체 때마다 그때그때 겪은 고난과 고통도 쉽지는 않았다”고 했다.
정 회장이 2년 후 경제 관료들에게 ‘통폐합’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한 배경이다. 또 그렇게 특강까지 할 수 있게 관계 개선이 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가까운 관찰자 이명박 전 대통령은 “5공 초기의 현대와 신군부와의 관계는 아주 나빴다. 단순히 길들이기의 차원을 넘어 재계 개편 시나리오에 의한 타도작전을 방불케 하는 공격이었다. 그러다가 5공 중반에는 밀월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러고는 말기에 가면 다시 관계가 악화되면서 정주영 회장에게 정치에 대한 환멸과 권력에 대한 동경이란 모순된 정서를 심어주게 된다”(『신화는 없다』)고 기록했다.
사실 기업이라면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불신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효율의 논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 회장도 사장단 회의에서 솔직하게 드러내곤 했다. “경제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과 은행이 하는 것”이 기본 인식이었다.
1984년 정부가 대기업 집중화를 막겠다며 은행들에게 30대 기업에 대한 여신 규모를 전년 수준으로 동결하도록 하자 정 회장은 10월 15일 사장단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우리나라 30대 그룹의 연간 이익을 전부 합해도 일본 대기업 하나의 연간 이익만도 못한데, 무슨 30대 그룹이 더는 크면 안 된다고…상식 이하의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짓을 하고 있어. 이 사람들 큰일 났다.”
“정부에서는 자기 돈으로 크라는 겁니다”라는 보고자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참 모르는 거다. 조그만 구멍가게는 자기가 자기 돈으로 크지만, 큰 기업은 공신력을 가지고 크는 거다. 크는 원동력을 상실시켜 놓고 도대체 어떻게 크라고 하는 거야. 발전을 균형시키는 게 아니고, 발전된 경제에서 세금을 거둬들여 극빈자를 도우면서 생활을 균형시키는 것이 균형경제다.”
정부의 현실 인식이나 역량에 대한 의구심은 전후로도 여러 차례 확인된다.
“우리나라 금융은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뒤처져 있다.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세부적인 것까지 정부가 기업은 위축되고 산업은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자유경제 체제의 핵심은 ‘창의성’이다.”(1984년 9월 24일)
“요즘 신문 보니까 상공회의소에서 재무장관이 나와서 부채비율을 200%로 만들겠다고 했다. 우리나라 10대 기업 중 실제로 300% 이하인 곳은 없다. 30대 기업 안에서도 서너 군데밖에 없다. 국가정책은 기업인이 절반은 따라갈 수 있게 세워야 한다. 일본은 평균 500% 될 거다.”(1984년 12월 10일)
1980년대 중후반을 거치며 권위주의 시대에 균열이 나고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게 된다. 정 회장은 정치적 격변이 기업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의를 기울였다.
“선거로 인한 정치권의 활성화는 잘못하면 기업을 위축시키는 분위기로 전환될 가능성도 크다. 그렇다고 해서 대기업이 지나치게 민감해질 필요는 없지만, 사회의 여러 압력이 우리 일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1985년 2월 25일)
곧 이은 총선에서 창당 한 달 남짓의 신한민주당이 67석을 얻으며 제1야당으로 부상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김영삼·김대중 등 양 김씨도 이 과정에서 야권 지도자로 다시 부상했다. 직선제 요구 등 정치적 목소리가 커졌다.
“우리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우리 일에 열중하면 된다. 정치는 정치가들이 맡고 기업은 기업가들이 확실히 자기 일을 해야지, 정치적 변동기에 기업이 휘말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1985년 2월 25일)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정치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정치에 휘말리는 형태 중 하나는 정치적 문담을 쓸데없이 하는 것이다.”(1985년 3월 4일)
정 회장은 이 무렵인 1984년 10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정치에 나설 것이냐’는 질문에 “개인적으로 정치에 직접 나설 생각은 없다”고 했다.
92년 통일국민당 창당…같은 해 대선 출마

하지만, 그는 7년 뒤 정계로 진출했다. 정 회장은 1992년 2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했고 한 달 만에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31명(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의 당선자를 내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해 12월 치러진 14대 대선에도 출마했다. 결과는 김영삼·김대중 후보에 이은 3위였다. 현대의 영지(領地)와도 같았던 울산에서조차 김영삼 후보보다 적게 나오자 정 회장은 크게 실망했다. 이듬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했다.
왜 당초 쳐다도 보지 않겠다던 정치에 뛰어들었을까. 주변에 따르면 직접적으론 노태우 정권과의 불화가 꼽힌다. 정 회장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 (더욱) 힘들어졌다. 큰 불편 없이 기업을 꾸려가려면 정부의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때마다 지도자한테 뭉텅이의 돈을 바쳐야 하는 이 나라가, 나라이기는 한 것이냐는 한심스러운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내가 정치 헌금을 중단하자 6공은 현대그룹 세무조사로 감정 풀이를 했고, 노 대통령은 3 최고위원(김영삼·김종필·박태준)과 회동할 때마다 나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고 한다.”

1991년 여름 국세청이 현대그룹에 두 달간 특별세무조사를 벌여 1361억원의 세금을 물렸다. 결국 정 회장은 노 전 대통령 임기말인 1992년 1월 9일 “1988~1990년 사이 청와대에 최소 260억원을 갖다 주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역시 기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을 맛의 시대’였다”며 “나의 1992년 대선 출마에 대한 앙갚음으로 우리 현대가 당한 불이익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라고 회고했다.
“이명박 사장 열심히 일했다” ‘젊은 임원’ MB에 무한 칭찬…정치길 들어서며 사이 갈라서

정주영 회장과 27년간 ‘현대인’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극적이다. 이 전 대통령의 ‘신화’인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을 가능케 한 건 정 회장의 신뢰와 용인술이었다. 1980년대 회의록 곳곳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정 회장은 1983년 1월 7일 계열사 중역들에게 전한 신년 특별메시지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행히 작년말 기준으로 총 47억 불 규모의 계약을 유지한 상태로 올해를 시작하게 됐다. 수주 활동에서 이명박 사장이 매우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고, 1984년 10월 8일 사장단 회의에선 “과거에는 현장에 상주하다시피 했지만, 지금은 이명박 사장이 주로 현장을 관리하고, 저는 연말에 바그다드에 가서 주요 개선사항만 점검하면 된다”고 했다. 사장단 회의에서 공개 칭찬에 박한 정 회장이지만, 이 사장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둘은 그러나 정치를 앞두고 갈라섰다. 1992년 1월 3일 신년하례식에서 정 회장은 “오늘 날짜로 나와 이명박 회장, 이내흔 부사장은 정치에 참여하는 거로 결정하고 오늘부로 회사를 사임한다”고 했지만 이 전 대통령은 응하지 않았다. 대신 두 달 후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전국구 제안에 응했다. 정치권에선 ‘정주영 바람’ 차단을 위한 전략적 영입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정 회장은 훗날 “배신한 건 아니고, 욕심을 좀 부린 것”이라는 정도로 말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의리론’에 대해 “진정한 전문경영인은 오너보다 더 주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