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 지났다" 80년 달러 제국의 균열 [북스&]

2025-10-17

1971년 여름, 유럽의 재무장관들이 미국 워싱턴으로 쫓아왔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금 태환 중단을 선언하자 유럽 각국이 들고 있던 미국 채권이 휴짓조각이 될 가능성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닉슨 행정부의 재무장관 존 코널리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달러는 우리 통화고, 문제는 당신들 거야(Our dollar, your problem).” 달러 통화 정책은 미국의 소관이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각국이 알아서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오만하지만 정확한 진단이었다. 그 한마디는 이후 반세기 넘게 이어질 달러 패권의 상징이 됐다.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난 지금, 하버드대 경제학자 케네스 로고프가 다시 그 말을 꺼냈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그는 금융 위기와 부채의 역사를 꿰뚫은 거시경제 전문가로 손꼽힌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직전 “대형 투자은행 하나가 곧 무너질 것”이라 경고했던 예언이 적중하며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의 신작 ‘달러 이후의 질서(원제 Our Dollar, Your Problem)’는 달러가 지배해온 지난 70년의 세계 금융사를 되짚으며 달러 패권의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로고프는 먼저 달러가 어떻게 ‘세계의 통화’가 됐는지를 짚는다.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기축통화로 공식화된 뒤 닉슨 시대의 금 태환 중단과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2008년 금융위기, 2020년대 미중 무역 전쟁까지 이어지는 굵직한 사건 속에서 달러는 ‘세계 통화’로 부상했다. 세계 외환 거래의 90%가 달러와 관련돼 있고 글로벌 외환보유고의 60% 이상이 달러로 구성된다. 과거 패권 통화였던 네덜란드의 길더화나 영국의 파운드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배력이다. 고도로 세계화된 무역·금융 시스템이 달러의 전례 없는 위력의 배경이 됐다.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로화는 패권 통화로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지역 화폐로는 제법 성공했다. 특히 옛 소련과 중국 등 반서구 진영은 달러 패권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어왔다. 달러 위기론은 반복돼 왔지만 정작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나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 강등에도 되레 강세를 보이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그럼에도 로고프는 달러의 정점은 이미 지나갔다고 진단한다. 그는 달러 패권이 2015년을 고비로 서서히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위기의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과도한 부채, 정치적 분열, 그리고 연방준비제도(Fed)의 독립성 약화가 달러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연방 부채는 36조 달러를 넘어섰고 이자 비용만 매년 1조 달러를 웃돈다.

무엇보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장벽과 ‘약달러’ 기조는 각국이 탈달러화를 서두르게 만들었다. 브릭스(BRICS) 국가들이 위안화 결제를 확대하고 유럽과 중동이 암호화폐·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실험하는 흐름도 같은 맥락이다. 로고프는 이러한 움직임을 일시적 현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는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에 몰두할수록 달러의 국제적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에도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다. 미국이 달러의 지위를 지키고 패권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우방국들이 미국의 헤게모니에 느끼는 ‘애증’의 감정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과 관련해서 그는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자 아시아의 독재국들에 맞선 보루”라며 한국이 달러 블록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국가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업을 다시 육성하고 싶어하고 한국이 이 분야 선도국임을 알면서도 “왜 징벌적 관세로 한국의 뺨을 후려치려 들려 하나”라고 일갈하며 모순된 태도를 지적한다.

최근 암호화폐와 디지털 통화가 달러의 지위를 위협할지에 대해 로고프는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암호화폐가 이미 20조 달러 규모의 세계 지하 경제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과세, 법 집행, 통화 정책의 틀을 흔들 정도의 통화로 자리 잡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본다. 통화의 지배력은 결국 군사력과 제도적 신뢰가 뒷받침될 때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고프는 “지폐를 나무 껍질로 만들던 몽골의 화폐도 그 뒤에는 쿠빌라이 칸의 권력이 있었다”며 화폐의 힘은 언제나 제국의 힘과 궤를 같이해왔다고 강조한다.

그의 결론은 명확하다. 지금 당장은 달러의 몰락을 예단하기 어렵지만 미국이 부채와 정치적 분열, 통화 정책의 왜곡을 방치한다면 달러 패권의 지위는 서서히, 그러나 어느 순간 급격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달러 패권은 국제 거시경제의 단골 주제이지만 관련 서적 대부분은 학술적이고 난해하다. 반면 로고프는 방대한 역사적 일화와 자신의 경험, 그리고 오늘의 사례를 생생하게 엮어 일반 독자들도 세계 금융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다. ‘우리의 문제’인 달러의 현 주소와 미래를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번역도 비교적 쉽고 명료하다. 2만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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