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사진을 본다는 건 인간 존엄을 경험하는 일”···세바스치앙 살가두 별세

2025-05-25

지난 23일(현지시간) 별세한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이견 없는 세계 최고 다큐 사진가 중 한 명이었다. 기아, 빈곤, 학살 같은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좌파 사회운동가이자 기후위기 속 원시 자연을 기록하고, 황무지 복원을 추진한 환경운동가였다.

브라질 현지 언론과 AP통신, 가디언, 뉴욕타임스 등이 환경 복원 비영리 단체 ‘인스티투토 테라(Instituto Terra, 대지의 연구소)’의 성명을 인용해 81세로 사망했다고 24일 보도했다. 살가두는 2010년 인도네시아에서 말라리아에 감염된 뒤 합병증을 앓아왔다고 한다.

다음은 살가두의 ‘자전적 고백서’인 <세바스치앙 살가두, 나의 땅에서 온 지구로>(솔빛길, 이세진 옮김)를 바탕으로 정리한 생과 작품 세계다.

살가두는 1944년 브라질 미나스 제라이스주(州) 한 작은 농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장주였다. 이곳은 “시장 경제 체제 밖”에서 굴러갔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없었다. 살가두는 상파울루 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한 뒤 빈곤과 불평등, 억압 문제를 깨닫는다. 군사 정권 치하였다. 한국 현대사와 비슷했다. 1964년 3월 31일 육군 장성 카스텔루 브랑쿠가 쿠데타로 2공화국을 무너뜨린 뒤 1985년 탄크레두 네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군사독재가 이어졌다.

살가두와 아내 렐리아 와닉 살가두와 함께 반독재 집회와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군사적 투쟁까지도 각오”한 좌파 정당 ‘인민행동’에서 활동했다. 공부를 병행했다. 1967년 12월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은 뒤 석사 과정 준비에 들어간다.

당시 당은 젊은이들은 외국에 나가 공부하면서 국외 활동을 진행하고, 선임들은 국내 지하 운동을 주도하는 방향으로 활동 기조를 잡았다. 살가두와 렐리아는 당 지침에 따라 1969년 프랑스로 간다. 프랑스 국립통계경제행정학교에서 공부하고, 화물조합에서 인부로 일했다. 브라질에서 고문당하고, 쫓겨난 망명자들을 위한 모금 활동 등을 벌였다. 살가두 부부는 당시 프랑스 정보부 감시를 받았다.

1971년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나서 영국 런던의 국제커피기구 일자리를 얻었다. 스포츠카를 사고, 근사한 아파트 구할 정도로 고액 연봉을 받았다. 이 기구에 들어가기 전 어느날 국립미술학교 건축학과를 다니던 아내 렐리아가 건축물을 찍으려 사온 카메라에 빠져버렸다. ‘경제학자’가 아니라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가 태어나던 순간이었다.

29세 때인 1973년 아내 동의를 얻은 뒤 프리랜서 사진가의 길로 들어갔다. 누드, 스포츠, 인물 등 모든 분야를 시도하다 보도 사진을 전문으로 삼았다. 아프리카 기아를 주제로 대규모 르포르타주 작업을 진행했다. 아프리카는 이후 수십년 간 찾은 곳이다. 곳곳에서 굶주림과 갈증에 고통받고, 전쟁에 피폐해진 삶을 담았다.

1979년 사면을 받은 뒤 브라질로 돌아가서도 농민, 소수민족, 선주민들이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투쟁하며 사는지를 기록했다. 1980년대 중반 노동에 경의를 표하는 ‘인간의 손’ 시리즈를 진행했다. 1986년에 아마존의 펠라다 금광에서 금을 채굴하는 광부들의 모습을 포착한 연작 사진은 대표작 중 하나다.

1976년 브라질 정부의 여권 갱신 거부로 프랑스에서 한때 난민 신분이었던 살가두는 인도와 이라크, 라틴아메리카와 발칸 반도에서 종교적, 기후적, 정치적 이유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난민 이야기를 ‘엑소더스’ 시리즈도 내놓았다. “잔인한 운명,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들”이었다. 이들의 “가까운 사람, 자기 자식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찍었다. 그는 ‘비참의 미학자’라고도 불렸다.

살가두의 작품은 곧 ‘인간’이다. 프랑스 언론인이자 <세바스치앙 살다두, 나의 땅에서 온 지구로>의 공저자 이자벨 프랑크는 “살가두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 여자, 한 남자, 한 아이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을 찍으려면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살가두의 말과도 이어진다. 그는 한 장소에 가면 몇 달씩 머물며 사람들과 동고동락했다. 그는 장소와 사람, 일을 좋아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찍는사람이 즐거워야 한다. 정말로 프리카를 좋아하지 않고는 그 대륙에 자기 인생의 5년을 뚝 떼어 바칠 수 없다.”

살가두는 인물을 촬영할 때면 신분을 감추거나 “무리 속에 슬쩍”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늘 그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하고, 취지를 설명하고, 함께 의논하고, 그렇게 서로를 차츰 알아갔다”고 했다. 그는 갈라파고스 제도 등지에서 동물을 촬영할 때도 “(동물들의) 영토를 존중한다는 점을 이해시키”려고 했다.

자연을 피사체로만 여기지 않았다. 1998년엔 살가두와 아내 렐리아 와닉 살가두와 함께 1998년 환경 단체 인티투토 테라를 설립한다. 1500년 포르투칼인들이 상륙한 이후 집약적 농업, 도시화, 산업화로 파괴된 브라질 대서양 연안 숲 조성을 해왔다. 2000㏊ 규모의 토지를 재조림했다. 약 700만 그루의 묘목을 길러냈다.

2000년대 중반엔 원시 자연과 인간 종의 기원을 찾아가는 ‘제네시스’ 작업을 시작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인간 집단을 촬영했다. 이 작품들은 “우리 모두가 하나의 전체, 지구라는 체계의 일부”라는 걸 드러낸다. 살가두는 2014년 동명의 전시회 개막에 맞춰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퍼펙트 데이즈> 감독 빔 벤더스의 2014년 작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은 이 작업 즈음 시기 살가두 삶과 작품을 다룬다.

살가두가 50년 동안 130여개 국을 돌아다닌 그가 확인한 건 “우리 모두가 가담한 이 소비 사회가 지구에 사는 많은 이들을 착취하고 빈곤에 빠뜨린다는 사실”이었다. 살가두는 “사진가가 되고 난 후로 착취당하는 그 세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불의를 고발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가고 싶었다”고 말한다.

“한쪽에서는 다 가진 자들이 자유를 누리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가뜩이나 없는 자들이 그나마도 빼앗기는 현실을 목격했다. 나는 그 약탈당하는 존엄한 세계를 사진에 담아 그러한 문제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유럽 사회에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부자 나라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이 세상 불균형의 결과라는 의식을 촉구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살가두의 별세 소식이 알려진 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이 애도 성명을 냈다. 그는 살가두의 작품을 두고 “인류의 양심에 대한 경고”라고 했다. 살가두가 회원으로 활동한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인간 존재 본질과 지구 현 상태에 대한 위대한 증인”이라고 했다.

인스티투토 테라는 “환경 복원이 인류를 향한 깊은 사랑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우리는 땅과 정의, 아름다움을 가꾸며 그의 유산을 계속 기릴 것”이라고 했다.

유족은 아내 렐리아, 두 아들 훌리아노와 로드리구가 있다. 로드리구는 다운증후군을 앓았다. 살가두는 “로드리구가 장애를 안고 태어나 괴로웠지만 그 아이로 인해 얻은 기쁨도 그 못지않게 풍성했다. 그 애는 우리에게 세상을 달리 바라보고, 조금 다른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선사해주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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