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45년 전 6월 3일, 나는 살아남았다, 부끄럽게도”

2025-05-24

[주간경향] “대량 학살이, 나의 죽음이, 예정된 세운상가 앞으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그날 종로의 하늘빛은 어찌나 푸르렀던지, 가로수 잎들은 어찌나 싱그러웠던지. 정말, 죽기엔 아까운 날이었다. 그러나 ‘양심’이라는 놈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양심이란, 그 고약한 녀석은 나를 죽음의 세운상가 앞으로 걷게 했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이 지난해 SNS를 통해 밝힌 회고다. 45년 전, 1980년 6월 3일 자신이 경험한 서울에서의 저항운동에 대한 것이다.

광주에서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의 항쟁이 진압된 다음 날, 정 위원의 신림동 자취방에는 10여명의 79학번 동기들이 모였다. 한 친구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사발통문을 전했다. 내용은 이랬다.

“1. 6월 3일 오후 3시에 종로3가 세운상가 앞에서 계엄령과 광주학살에 맞서는 시위를 시작한다. 2. 그날 미반납된 총을 소지한 광주에서 올라온 우리 측 결사대 500명이 나올 것이다. 3. 공수부대는 기관총과 탱크·총검으로 우리를 진압할 것이고, 양측 간에 총격전이 벌어질 것이니, 총을 갖지 못한 우리 같은 자들은 부엌칼, 과도, 빨랫방망이 같은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위한 무기를 지침하고 나오라.”

80년 6·3 세운상가 시위 누가 기획했을까

그때 정 위원의 나이는 만 19세. 대학 2학년 물리학도였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가 꿈’이었던 자신이 이렇게 전혀 승산 없는 전투에서 무참히 죽어가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사형수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라고 떠올렸다.

“하늘이 노랗다고 하는데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죽음을 앞둔 공포감은 몸과 뇌를 마비시켜 정말로 하늘이 노랗게 보이게 만들었다.”

살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6월 3일 세운상가에 안 나가면 된다. 하지만 그놈의 ‘양심’이 문제였다. “광주에서는 수천명이 학살당했는데, 너는 겨우 네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세운상가 앞 시위를 피해? 부끄러운 줄 알아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피할 수 없었다.

6월 3일, 친구 3명과 신림동에서 버스를 타고 시청 앞에서 내렸다. ‘4명만 모이면 불법 집회로 간주하겠다’는 포고령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세운상가로 향했다. 그가 택한 길은 종로1가 YMCA, 탑골공원을 거쳐 세운상가로 가는 길이었다.

공수부대원을 태운 군용트럭 10여대가 지나갔고, 형사들은 20대로 보이는 청년들을 수시로 검문·몸수색을 했다. 전달받은 지침을 그는 어기고 있었다. 차마 누군가를 찌를 수는 없어 과도나 부엌칼 등의 무기는 들고 가지 않았다.

마침내 도착한 세운상가. 오후 3시가 됐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양가적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내 목숨을 건졌다. 광주 영령들께 부끄럽게도….” 동시에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나는 내 목숨을 건졌다. 고맙게도….”

이후 그의 삶은 달라졌다. 물리학도의 꿈을 포기하고 인생을 다 바쳐 군사독재와 싸우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1980년대를 보냈다.

기록은 없지만 증언은 있어

당시 정 위원이 전달받았다는 ‘6·3 세운상가 시위계획’은 어떤 기록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일 현장에 나간 건 정 위원만이 아니다. 그는 “79학번 단톡방에서 그때 이야기를 하니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있었던 종로1가 쪽에선 아무런 집회가 없었는데, 을지로 쪽에서는 큰 규모는 아니지만 시위가 열려 참여했던 학생들이 잡혀가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당시 정 위원이 있던 곳의 반대쪽인 아세아극장 인근 시위에 나갔던 이재철씨의 말이다.

“정황은 비슷한데 날짜는 명확하지 않다. 그때 소문이 광주에서 무기가 올라와 총동원령이 떨어졌고, 저는 아세아극장 청계천 쪽으로 나가는 것으로 연락을 받았다. 4시쯤 어디를 가라, 그런 소문이었다.”

큰 도로로 나오면 불심검문을 당하니 골목으로 숨어 70~80분 정도 인근에서 배회했다.

“두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연행만 당해도 구속되는 상황이었으니…. 누구누구는 잡혀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씨의 회고에 따르면 5월 15일 소위 서울역 회군 이후 그런 기습적인 ‘가투(가두투쟁)’는 여럿 있었다. 이씨가 참여했던 가투는 구로동, 아세아극장,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익선동 피카디리극장 앞 등이었다.

주간경향이 1980년 5·18 이후 서울에서 열렸던 시위 참가 경험을 조사해본 결과 꽤 많은 사람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종전까지 공식 기록으론 5월 15일, 이른바 서울역 회군 이후 신군부 측이 5월 17일 기습적으로 자행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각 대학 캠퍼스를 장악하고,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전국총학생회장단을 연행하면서 서울에서의 항쟁은 잦아들었다. 반면, 광주에서는 5월 18일 전남대 교문 앞에 모인 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한 것이 이른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서울대의 경우 당시 학생들을 이끌던 유시민 대의원회 의장이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동시 급습한 계엄군에 잡혀 연행되면서 지도부 공백으로 이후 시위는 열리지 못했다는 것이 종전까지의 정리된 기록이다. 그러나 취재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계엄 확대 이후에도 산발적이나마 지속적인 시위계획이 있었고, 실제 열렸다는 것이다.

유강근 변호사는 계엄 확대 조치 이후인 5월 17일 영등포시장 쪽에서 오후 5시경 열린 집회에 참여한 기억이 있다고 했다.

“영등포시장 쪽 역 부근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30~40명이 무리를 지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진압에 나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유 변호사에 따르면 5월 18일에는 이른바 5·15 서울역 회군 장소인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 앞 서울역광장에서도 150여명이 모여 구호를 외쳤다. 거기에는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사복경찰들이 와서 해산에 나섰다.

서울역 앞에서 진행된 집회 날짜에 대한 기억은 엇갈린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 조사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 참가한 김성환씨는 5월 15일 서울역에서 해산하면서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될 경우 계엄 선포된 첫 월요일 오전 10시에 학교별로 지정된 장소에서 모이는 것으로 지침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예컨대 서울대는 서울역 앞, 고려대는 안암동로터리, 연세대는 신촌로터리와 같은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해는 5월 19일이 월요일이었다. 서울역 앞에 200~300명이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반에 진압당해 남대문경찰서에 끌려갔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나는 5월 27일까지 두들겨 맞았다.”

강석령씨는 서울역 앞에서 연행된 것을 5월 18일로 기억했다.

“40~50명이 잡혀 있었다.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시는 자세히 몰랐다. 경찰로부터 ‘광주는 지금 야단났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잡혀 고초를 겪은 예도 있다.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은 5월 26일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집회를 모의하다 잡혀 기소유예를 받았다.

“5월 21일 사당동에 있던 우리 집에 모여 광주 상황을 걱정하면서 ‘서울에서도 5·18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야 광주 사람들이 덜 희생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를 나누며 5월 26일 집회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일을 했다. 그 이야기가 샜는지 당일 종로 단성사 앞에 나갔더니 수경사(현 수방사) 병력이 위력 시위를 하는 것이다. 집회는 불발이었다.”

정 교육감의 말이다. 그가 잡힌 것은 5월 31일 자정 무렵이었다. 누군가의 신고로 덜미가 잡힌 것이다.

“서대문구치소에 이감돼 거기서 황지우 시인을 만났는데 잡혀온 경위를 들어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단성사 앞에서 유인물을 뿌리며 집회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광주 진상 알리려다 고초 겪은 사람들

이화여대 복학생으로 1980년 ‘서울의 봄’ 집회를 이끌던 최정순씨.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93개 전국총학생회장단 대다수가 붙잡혔지만, 그는 도피에 성공했다. 그 뒤에도 복학생 대책협의회를 중심으로 유인물을 몰래 찍어 돌리는 일을 진행했다.

“광주항쟁 기간에 누가 광주 상무관에 안치된 136명의 희생자 사진이 실린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를 구해 와서 돌릴 수 있겠냐고 해서 복사해서 돌렸다. 6월 13일 화신백화점 앞에서 집회하자고 해서 나갔는데 이미 정보가 샌 모양이었다. 거기서 붙잡혔다.”

종로경찰서를 거쳐 합수부로 연행된 그는 ‘김대중 내란 사건의 이대 총책’으로 만들려는 합수부의 고문과 협박에 시달렸다. 구치소에서 가혹행위를 당했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돼 1년 2개월을 살다가 1981년 8·15 특사로 나왔다.

“짜맞추기 수사였다. 같이 집회를 주동한 거로 돼 있는 이호열은 6·13 집회에 독침을 들고 왔다고 엄청나게 고생했다. 그게 만년필이었는지 뭔지 잘 모르겠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신화섭과 서울대 공대생이었던 정이근은 화염병을 만들었다며 우리 사건과 엮어 공소장이 만들어졌다.”

광주 출신으로 당시 서울에서 5·18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 제작 배포팀을 했던 황광우 작가는 “흔히 5월 광주가 광주로 시작해 광주로 끝난 거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보면 5월은 서울에서 쭉 진행됐고, 그게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나면서 비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오세제 현대정치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신군부 측에 부끄러운 패배로 인식되면서 당시 참여자들이 밝히길 꺼리는 모습이 있지만, 실패한 경험이라도 정확한 사실의 기록과 역사적 규명작업이 더 늦지 않게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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