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티션스토리](상) '모범생' 서왕진, 환경전문가에서 정치 입문한 비하인드

2025-03-20

[서울=뉴스핌] 윤채영 기자 = 서왕진 조국혁신당 의원이 뉴스핌TV KYD(Korea Youth Dream) '폴리티션스토리'에 출연해 어린 시절부터 정치 입문 과정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했다.

서 의원은 20일 오후 유튜브 채널 '뉴스핌TV'를 통해 공개된 폴리티션스토리에서 모범생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했던 일화까지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서 의원은 지난해 4월 치러진 22대 총선에서 조국혁신당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혁신당 정책위의장을 거쳐 최고위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현재 최고위원과 혁신정책연구원장을 겸하며 당내 정책을 주로 총괄하고 있다.

서 의원은 1964년 전남 영광 출생으로 이곳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토박이다. 서울대 신문학과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시민운동을 하며 환경문제를 접했고, 미국 델라웨어 대학교 대학원에서 에너지 환경정책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 의원은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환경정의연구소 등을 거쳐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정책특보로 임명돼 정책 개발에 참여했다.

다음은 서 의원과의 폴리티션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윤채영 기자. 이하 윤) 한 정치인의 인생 궤적을 돌아보는 폴리티션 스토리 안녕하세요. 정치부 윤채영입니다. 오늘은 조국혁신당의 서왕진 의원님 모시고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의원님

▲(서왕진 의원. 이하 서) 반갑습니다. 조국 협신당의 서왕진입니다.

-(윤) 간단하게 자기소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서) 예 저는 조국혁신당에서 비대위원을 맡고 있고요. 당에서 최고위원 또 혁신 정책연구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지역으로는 광주시당 쪽을 맡아서 지역도 가끔 오가는 그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윤) 요즘 정국 현안이 워낙 바빠서 이제 좀 그런 의원님도 되게 바쁘게 지내실 것 같은데 의원님을 알아보는 시간도 좀 저희가 놓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모셨어

▲(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윤) 먼저 아주 어릴 적 과거로 한번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의원님의 그 가족 관계 어떻게 되시는지 좀 궁금하더라고요.

▲(서) 예 저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서 아주 대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는데요. 저희가 무려 8남매나 됩니다. 요즘 가족 규모로 보면 상상하기 힘들죠 네 아버지는 전형적인 정이 많은 농부셨고요. 어머니가 비교적 집안일도 하지만 대외 활동도 하시고 주로 집안의 리더 그런 역할을 담당했던 기억이 나는데 8명 8남매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여러 이제 나이터홀이 좀 있으니까 제가 좀 이렇게 철 들고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형이나 누나들은 또 객지로 떠나 있어서 집에서 많이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8남매의 어떤 아주 다복함 이런 게 있었던 기억이 있어요.

-(윤) 의원님이 몇째셨던 거예요?

▲(서) 제가 무려 8째입니다.

-(윤) 그럼 위에랑 나이 차이가 엄청 많이 나시

▲(서) 네 큰형님이 이제 제일 위에 계시는데 거의 뭐 아버지 같은 그런 느낌이죠.

-(윤) 그러면 귀여움 많이 받고

▲(서) 보통 그 옛날 대가족 구조 그 구성 속에서는 부모님들이 8명을 다 일일이 이렇게 돌보기 힘드시잖아요. 위에 형 누나들이 또 아래 돌보고 이러면서 잘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막내라서 아마 그랬을 것 같습니다.

-(윤) 어머님이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셨고 거기서 초중고를 다 졸업을 하신 건가요?

▲(서) 영광 좀 아세요? 윤 기자님 굴비 아 예 맞습니다. 영광 굴비로 유명하고 사실은 종교 중에서도 원불교가 만들어진 곳이고 창립된 곳이고 또 불교 부분에 있어서도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마라난타라고 우리나라의 불교를 이렇게 처음 가져온 스님 중에 한 분인데 그분이 영광을 통해서 왔고 그분이 세운 절이 불갑사라고 있거든요. 영광은 상당히 그런 어떤 좀 약간의 성스러운 곳이 있는 곳인데 제가 거기서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네 영광에서 다녔고 보통 저희 때는 이제 조금 더 공부를 할 기회를 가지려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이렇게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도 고등학교를 광주로

-(윤) 대도시로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광주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거예요?

▲(서) 광주 석산고등학교인데요. 제가 10회인데 아주 오래된 학교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과거에는 이렇게 막 명문고로 알려져 있지는 않았는데 저희는 이제 평준화라고 소위 그때 시절 이야기로 하면 뺑뺑이 꼽히는 그런 고등학교였고 저희 때는 꽤 공부도 잘하고 성적이 좋았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지금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동네가 지금은 이제 광주의 남구인데 약간 변두리로 저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도청에 있던 금남로라든지 여기가 이제 중심지고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좀 변두리로 생각했는데 지금 세월이 한참 지나서 보니까 거기가 광주에 강남이 됐다고 그러더라고요. 진짜 그래서 또 무슨 학군도 상당히 좋아졌다고 그러고 공부도 잘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윤) 그 어릴 적 초중고 시절에 의원님의 성향

▲(서) 어떤 성향이셨어요? 그냥 모범생이긴 했는데 사실은 아주 저는 진짜 산골 시골이었거든요. 그래서 주로 그냥 산으로 들로 뛰어 노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모범생 스타일이긴 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는 반장 회장 이런 걸 맡아서 했는데 그런 데 관심이 높았다기보다는 주로 뛰어노는 데 관심은 더 높았던 것 같아

-(윤) 그런 모범생인데 공부도 잘하면서 뛰어놀기도 잘 하신

▲(서) 요즘 학생들은 상상하기 힘들 텐데 저희 때는 따로 공부라는 걸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들으면 그래도 우수한 학생이 되고 나머지 시간은 그냥 마냥 노는 것 그게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고 제가 생각해도 좀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좀 살아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합니다.

-(윤) 그래도 서울대를 졸업하신 걸로 아는데 그러면은 전형적인 그 모범생들 1등을 얘기하는 교과서로 공부했다. 그런 그런 말로

▲(서) 예 그러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는 그냥 마냥 놀았던 것 같고요. 이제 광주로 고등학교를 온 뒤로는 그래도 대학 입시라고 하는 게 있었고 또 공부는 잘해야 된다라는 부담감이 없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그때부터 열심히 했고 아주 잘하지는 않았고 저는 재수를 했으니까 한 번 대학 실패를 했었고 재수할 때 좀 열심히 해서 성적이 좀 잘 나왔었던 것 같아.

-(윤) 그 보니깐 서울대 신문학과를 졸업했다고 하는데 이 전공을 당시에 택했던 이유가 있나요?

▲(서) 지금은 이제 언론정보학과라고 학과명이 그렇게 됐더라고요. 제가 뭐 그 시절에 이렇게 많이 생각을 하고 진로에 대해서 많은 정보와 고민을 특별히 이렇게 이렇게 누가 상담을 해주는 것도 없었고 많은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은데 공부 분야로 보면 저는 사실은 국문학 중에서도 고전 문학을 좋아했었어요.

그래서 아마 그쪽 분야를 택했으면 공부를 좀 하는 쪽으로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입시 점수가 잘 나와가지고 좀 더 직업적으로 팬시해 보이는 이 미디어 언론 쪽을 선택하다 보니까 신문학과를 선택했는데 사실 저희 때 제가 이제 1984년에 대학 들어갔거든요. 과와는 상관없이 들어가자마자 학생 운동하고 사회과학 서적 공부하고 이런 것들이 주류여서 별로 공부는 못 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 때

-(윤) 그러면 의원님이 갖고 있었던 꿈은 뭐였어요? 어떤 일을 하고 싶었었을까요? 예전에

▲(서) 사실 어렸을 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슨 구체적인 꿈 이런 거는 잘 기억은 안 납니다. 그냥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루하루 그냥 마냥 뛰어노는 게 너무 즐거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고 약간 우스갯소리입니다마는 그 시절에 초등학교 때는 학교를 졸업할 때 이렇게 성적에 따라서 상을 받잖아요. 가장 높은 상이 교육감상이었어요. 전라남도 교육감상 그래서 교육감이 제일 높은 줄 알고 장래 뭐가 되고 싶으냐 그러면 교육감이 되고 싶다 이렇게 써본 적은 있는데 무슨 적극적인 꿈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윤) 어릴 때부터 꼭 하고 싶은 꿈이 있었거나 그런 거는 없었던 거예요.

▲(서) 마냥 놀고 싶었던 아이였습니다.

-(윤) 의외예요. 의원님 의원님이 대학 가셔서는 이제 좀 환경 쪽에 관심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환경 전문가로 좀 많이 알려져 있으셔서 어떻게 하다가 환경 쪽 분야를 좀 더 연구하게 돼.

▲(서) 사실 학과로 보면은 이제 언론정보학이니까 뭐 언론이나 광고 홍보나 미디어 이런 쪽을 해야 되는데 학생 운동을 사실은 꽤 열심히 했던 셈이고 학생 운동도 했고 저는 사실은 노동 운동도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 운동도 했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또 시민운동도 했습니다. 소위 운동권의 3종 세트를 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환경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학생운동 때나 노동운동 때는 아니었고 1990년대 초에 시민운동을 시작했을 때 경실련이라는 시민단체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처음 이제 시민운동을 시작했는데 그게 1992년 3년 이런 때였습니다. 그래서 1992년 이제 환경 쪽에 자라는 사람들은 어떤 해로 기억을 하느냐면 브라질에 있는 리오라는 도시에서 세계 환경회의라는 것을 열었는데 그때 전 세계적으로 환경 문제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됐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학생운동이나 노동 운동 때 다뤘던 주제들 민주화라든지 또는 뭐 아주 진보적인 사회 개혁이라든지 이런 거 하고 또 다른 차원에서 환경 문제라는 게 굉장히 우리 인류의 어떤 미래를 미래와 관련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이런 것들을 느끼면서 시민운동하면서 환경 문제를 처음 관심을 갖게 됐고 본격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윤) 그러면 학생 운동을 먼저 하시고 그다음에 시민운동을 하셨다.

▲(서) 그렇습니다. 학생 운동하고 노동 운동하고 그다음에 시민운동을 했습니다.

-(윤) 근데 학생운동이라고 하면 어떤 단체로 가입을 해서 어떻게 좀 활동을 하셨어요?

▲(서) 생소하시죠? 학생운동이라는 게 벌써 이게 뭐 상당히 학생 운동이 많이 전성기던 시기가 벌써 한 30 40년이 됐으니까 학생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대학교의 학생 조직들이 자체적으로 사회과학 서적도 공부하고 당대의 어떤 특히 이제 민주화 문제였는데요.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어요. 전두환 대통령이 되기까지 광주에서 우리 시민들을 어떻게 보면은 총칼로 학살이라고 그때는 제가 표현을 했는데 그렇게 해서 권력을 잡아서 일종의 군사 통치 이번에 윤석열 씨가 시도했던 거하고 어떻게 보면 유사한데 그때는 진짜 실행을 했고 실현이 됐었던 거죠.

그 군사 통치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을 뽑을 권리도 없고 언론들도 자유롭게 언론의 어떤 의상들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집회 시위 자유도 굉장히 제한돼 있었고 그래서 반민주적인 부분들을 해결하고 군사적 무력으로 국가와 정부를 통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는 차원에서 거기에 저항하고 그걸 바꿔야 된다라는 주장을 열심히 하는데 주로는 뭐 거리에서 이렇게 시위도 하고 또 학교에서 이렇게 돌멩이도 던지고 뭐 하면서 그런 시위를 많이 하는 게 학생운동의 주요한 어떤 행태였다고 보여집니다.

-(윤) 당시에 같이 활동했던 그 분들이 지금 현직에도 많이 계시잖아요. 아시는 분들이 좀 많이 계시

▲(서) 예를 들면 2학년 때 학생회장 서울대 학생회장이었던 김민석 의원이기도 하고요. 우리 조국 대표님은 그때는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역시 학생 운동을 열심히 했던 분이라고 할 수 있고 요즘 내란 사태 관련해서 굉장히 많은 정보를 이렇게 뽑아내고 있는 박선원 의원 같은 경우는 서울대는 아니었고 연세대였습니다마는 그 당시 굉장히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였던 광주 사태 때 미국이 제 역할을 안 하고 오히려 전두환을 비호했다라는 비판 의식이 그때는 많아서 을지로에 있는 이제 과거에 있었던 미문화원을 점거해서 투쟁을 했던 때 박선원 의원 같은 경우는 거기에 들어갔던 분이에요. 그런 식으로 이렇게 그 시절에 했던 분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고 볼 수 있죠.

-(윤) 부모님이 그러면은 시민운동을 하시면서 이제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셨고 그 이후에 그럼 미국의 필라데어 대학 대학원까지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을 하셨어요?

▲(서) 맞습니다. 92년 3년부터 이제 시민운동을 시작했고 시민운동을 시작하면서 환경 문제를 제가 이렇게 인식을 하게 됐고 환경 운동을 본격적으로 한 거는 94년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94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굉장히 다양한 분야 현장의 어떤 환경 문제 또는 환경 정책을 이렇게 바꾸기 위한 캠페인 이런 활동들을 쭉 했고요.

10년 정도 시민운동을 하다 보니까 내가 좀 오랜 시간 동안 할 만큼 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했던 환경정의라는 단체에서 일종의 1년 정도 좀 휴지기를 갖고 좀 공부도 좀 하고 뭔가 그다음 단계로 뭘 할지를 좀 이렇게 모색하는 시간을 일종의 안식년 같은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미시간에 있는 미시간 주립대에서 무슨 프로그램이 있어서 누가 연결을 잘 해줘 가지고 가서 시간을 좀 가졌었는데요.

그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환경운동을 10년을 했고 환경의 현장이나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밝고 잘 아는 것 같은데 뭔가 좀 학문적 체계나 이론적 체계가 좀 충실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또 대학교 때도 학생 운동하느라고 공부도 제대로 미처 못해서 공부를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고 환경 운동을 하던 시절에 마침 제가 에너지 문제를 좀 이렇게 연구하는 활동을 했었는데 그 시기에 마치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교환 교수로 왔던 존 번이라고 하는 미국인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분하고 인연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마침 그분이 한국의 환경운동이나 시민운동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과 이렇게 존중이 있어서 미국에 있는 델라웨어 주라고 작은 주인데 그 델라웨어주의 델라웨어 대학에 있는 본인의 학과에 어플라이를 해서 절차가 잘 되면 장학금을 주겠다고 그래서 그래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2005년부터 한 5년 정도 박사 학위를 했습니다.

-(윤) 엄청 열심히 공부를 하셨네요. 그 5년 동안 미국에 계시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셨겠네요 그러면은 그 대학원 가기 전에도 아까 말씀하셨던 그 단체에서 활동을 좀 하시다가 환경 정의에서 일을 하시다가 그러면 제가 궁금한 거는 그 시기에 수익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단체로 활동하시면서 좀 있었을까요?

▲(서) 지금도 한국의 시민운동은 뭐 굉장히 어려운 여건에서 활동을 합니다마는 그때는 더 좀 어려웠던 것 같고요. 일종의 활동비라는 것을 받긴 받습니다. 월급처럼 받긴 받는데 아주 최소 활동비를 받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하면서 활동을 하는 시기였고요. 그걸 10년 했으니까 아마 좀 지치기도 했었을 겁니다.

-(윤) 10년 동안 하시고

▲(서) 그리고 나서 이제 마침 델라의 대학에서 좀 먼 교수가 장학금을 줄 수 있다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저로서는 학교에 둔 돈이나 이런 게 없는 상태였는데 전세금 빼고 가가지고 가서 5년 동안 공부를 하는 그런 기회를 가졌었어.

-(윤 )미국 물가도 싸지 않잖아요.

▲(서) 미국은 그래도 뭐 그 당시만 해도 비교적 괜찮았는데 또 델라웨어가 아주 무슨 번화한 대도시 지역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주는 장학금에 이제 학비 면제에다가 약간 생활비도 주거든요. 그래서 좀 견딜 만했던 것 같아요.

-(윤) 그러면 5년간의 박사 과정을 끝나고는 어떻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신 걸까요?

▲(서) 그러니까 2005년부터 학기를 시작해서 2009년 말에 박사 학위를 마무리를 했고 귀국을 해서 어떻게 보면 제가 마흔에 박사 학위를 시작했기 때문에 상당히 나이 들어서 늦깎기 박사였거든요. 돌아와서 이제 대학들에서 강의를 하면서 강사로 이렇게 일을 했었고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에서 기후 문제 관련해서 연구 교수로 채용이 돼가지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이제 조금은 강의하면서 이렇게 여유 시간이 있을 때 박원순 당시 변호사였죠. 시민운동할 때 존경하는 선배였기 때문에 그런 서울시장 보궐 선거가 시작되면서 그걸 돕다가 강사 이거 다 때려치우고 서울시장 선거를 돕는 그런 시간으로 이렇게 연결이 됐었습니다.

-(윤) 자연스럽게 그때가 그럼 어떻게 보면 정치에 입문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서) 그렇습니다. 예 뭐 사실은 저는 그때 정치에 입문한다 이런 의식이 아주 확고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박원순 선배죠. 그 당시에는 소위 시민운동에서 가장 대표격인 시민운동가 선배였는데 2011년에 보궐 선거가 있었고 당시 박원순 변호사가 이제 서울시장직에 도전한다고 했는데 기존 정당 후보가 아니잖아요.

기존 정당 후보들은 정당에서 다 이게 뒷받침이 되는데 그런 게 없어서 시민사회 활동을 함께했던 후배들이 많이 참여해서 도움을 줬었습니다. 그때 이제 저는 박사 학위 하고 와서 한국에서 강의한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정책 분야를 좀 맡아서 책임을 지고 하라고 그래가지고 그 캠프에서 정책단장을 맡아서 활동을 했었습니다.

-(윤) 여담으로 이제 의원님의 그 머리 스타일이 이제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시잖아요. 좀 궁금하긴 하더라고요. 찾아보니까 계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서) 뭐 계기라는 게 특별할 건 없고요. 사실은 염색을 해야 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했죠. 특히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마는 2011년도에 서울시에 들어갔을 때 정책특보 일을 할 때도 머리가 꽤 하얗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 주변에서 이렇게 조언하는 분들은 시장님은 염색을 해서 이제 까만 머리인데 밑에 보좌하는 정책 보좌역이 머리가 하야니까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해서 염색을 좀 하라고 권유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한두 번 염색도 했었습니다. 근데 우선 좀 불편하고요. 그다음에 염색하러 미용실 가면은 미용실에 계시는 분들이 이 흰머리가 비교적 자연스럽고 괜찮다 예쁜 것 같아요. 색깔이 그래서 귀찮은 김에 네 핑계 삼아서 염색을 안 하고 있습니다.

-(윤) 그럼 이건 자연 백발이

▲(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뭐 이렇게 정치를 시작했지만 아직 초보자고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지도 않은데 그래도 저를 알고 저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사진에 흰머리를 찾으면 된다고 그래서 확인이 딱 돼

-(윤 )그 이미지적으로 괜찮다

▲(서) 편하다고 그럽니다.

-(윤) 의원님이 테니스를 아주 좋아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치시고 잘 치실 정도로 좋아한다고 테니스를

▲(서) 좋아합니다. 좋아하고 테니스는 유학 생활할 때 이제 처음 배워서 저는 뭐 운동을 비교적 좋아하고 잘하는 편인데 그런데 이제 원래 테니스는 좀 제대로 레슨을 해서 정식으로 배워야 되는데 그렇게 배우지 못해서 좀 실력의 향상은 한계가 있습니다마는 즐겁게 잘 어울려서 칠 정도는 돼서 테니스를 굉장히 즐기는 편이었고요.

특히 연구원장 서울연구원장 마감하고 서울시립대 교수하던 시절에는 서울시립대 실내 코터가 있는데 너무 좋거든요. 거기서 정말 마음껏 테니스를 즐겼던 때가 저로서는 좀 행복했던 때이기도 한데 조국혁신당 준비하면서부터는 1년 넘게 지금 테니스를 한 번도 못 하고 있습니다.

-(윤) 아예 시간이 안 나시

▲(서) 예 뭐 시간도 안 나고 올겨울은 또 유난히 춥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 못하고 있는데요. 이제 날이 좀 풀리고 이 정치 상황이 좀 정리가 되면 국회에 테니스 코트가 있다는 거 혹시 아십니까? 국회 방송 있는 곳 있잖아요. 괜찮은 자리에 테니스 코트가 있습니다. 국회 안에 있는 의원 중에서는 진보당 윤종오 의원이 테니스를 잘 치신대요. 그래서 국회 본관 가면 제 뒤쪽에 윤종우 의원 앉아 있는데 테니스 함께 좀 치기로 윤종우 의원이 잘 안내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윤) 그럼 의원님 테니스뿐만이 아니라 운동 되게 좋아하고 잘하신다 했는데 다른 운동도 전혀 취미 삼아 못 하고 계신 거예요

▲(서) 저는 사실은 저 초등학교 때는 축구 선수였어요. 그래서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이제 축구는 좀 부상 위험도 있고 그래서 잘 못하는 편이고요. 테니스를 잘 못할 때는 제가 사는 동네 지금 고향 지축에 사는데 그 동네에 커뮤니티가 있고 실내 체육관이 있거든요. 그래서 탁구를 또 열심히 쳤었습니다.

-(윤) 그렇구나 그걸로 이제 대신 좀

▲(서) 한동안 탁구로 체력을 그래도 관리했는데 요즘은 탁구도 못하고 테니스도 못해서 날 풀리고 이 정치 상황 정리되면 빨리 운동을 시작해야지 살아날 것 같습니다.

ycy1486@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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