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철학] 대체 불가능한 토종

2026-01-01

한가할 수밖에 없는 계절입니다. 정확히는 12월 말에서 꼬박 1월 말까지 그렇습니다. 한가하기는 해도 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덤바우는 지형상 유난히 밭과 밭 사이의 경계인 둔덕이 넓어 풀은 물론 이런저런 나무들이 멋대로 자랍니다. 가장 흔한 게 버드나무이고 그 뒤가 뽕나무인데 모두 생명력이 대단합니다. 말 그대로 ‘근절’하지 않으니 한 해 사이 눈에 띌 만큼 자랍니다. 덤바우 밭 둔덕은 넓으면서도 가팔라 거기 자라는 나무를 근절하면 흙이 무너져 내리고 둔덕은 더 넓어집니다. 그래서 불편을 감수하고 매년 또는 한 해 걸러 둔덕의 나무를 베는데, 그걸 하는 때가 주로 1월입니다. 다소 춥더라도 칼바람만 불지 않는 날이라면 톱질하고 자른 가지 정리하기에는 적당한 철인 셈입니다.

요맘때 주로 하는 일로는 씨앗 정돈도 있습니다. 주로 아내 차지인데요. 한 해에 걸쳐 거둔 것들이 많지만, 해를 거르며 심지 않아 묵은 씨앗들도 상당합니다. 이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씨앗은 같은 품종의 다른 종자, 다른 품종의 종자를 모두 합치면 백여 종이 훌쩍 넘습니다. 물론 모두 토종입니다. 씨 받은 연도와 이름 등 필요한 꼬리표를 일일이 다는 아내를 보게 되면 저는 슬슬 피합니다. 숫자를 헤아리는 사람에게 말을 걸면 세던 걸 잊어 낭패하기 마련입니다. 아내는 낭패감 대신 불같은 화를 뿜어냅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씨가 섞이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니라 폭삭 망하는 거니까요.

아내는 토종을 심고 기르면서 늘 토종의 특성이 잘 유지되는 씨앗을 받는 데에 골몰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교잡되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는 겁니다. 모든 작물이 그렇지는 않지만, 당대 교잡마저 심한 작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호박, 오이, 참외, 유채, 배추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까 토종을 다루는 농민들은 특정 토종작물의 혈통 유지에 온 정성을 쏟고, 교잡을 피하는 방법에 골몰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약간의 오해도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토종의 보존과 유지, 그리고 증식이 어떤 ‘순계’를 이어가는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통념이 있습니다.

토종의 탄생

먼 옛날 농업 발생 초기에는 좀 더 결실이 풍성하고 굵은 종자를 발견해내고자 혼신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농사라는 것이 어렵기는 해도 그 원리는 단순하지 않습니까? 더 낫고 많은 수확을 할 수 있는 종자야말로 농사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초기 농업에서는 이미 작물화한 농작물이 많지 않아 더욱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 노력의 결실이 밀, 보리, 벼 등이고 지금껏 우리는 그것들을 주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들이 농업의 주요 작물로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밀을 예로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원시 농업을 하던 농민들이 유전학을 알았을 리 없으나 그들은 사실상 배수체(Polyploid)에 주목하였습니다. 사람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과 일반적인 식물은 2배체입니다. 부모의 염기서열을 각각 반씩 받아 태어나는 자손이 2배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룰이 깨져 3배체, 4배체, 6배체 등이 나타난 것을 한 데 묶어 배수체라고 부릅니다. 밀은 이 중에 6배체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자연계에는 6배체 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밀은 농업이 시작(약 1만~1만2000년 전)된 후 (약 8000~ 9000년 전) 다른 식물과의 교잡에 의해 6배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농민에 의해 6배체 밀이 선발되었다고 보는 게 옳겠습니다. 6배체 밀은 ‘빵밀’이라고도 불립니다. 어떤 식으로든 가공하기에 안성맞춤인 종자였던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빵밀은 전 지구적인 환경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었으니 재배가 일찌감치 보편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연계의 밀은 농업에 도입됨으로써 지금의 특성을 가지는 밀로 진화했습니다. 그 과정에 농민이 개입되었으니 농업이 없었더라면 6배체 밀도 존재하지 않았겠습니다. 밀은 어쩌면 농업 최초의 성공적인 개량종일지도 모릅니다.

토종의 역사

몇 단계를 거쳐 식물은 농업에 도입되었습니다. 첫 단계에서는 밀, 보리(메소포타미아), 벼(아시아), 옥수수(아메리카) 같은 화본과(벼과) 식물, 즉 곡물류였습니다. 이들은 에너지원의 확보에 적합한 식물들이었습니다. 단위 면적당 칼로리가 높고, 건조하여 장기 보관에 적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야생종과 확연히 구분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야생 밀이나 벼는 씨앗이 익으면 스스로 땅에 떨어져 번식하는데, 농민은 이러한 탈립성이 없는 것을 선택하여 재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작물화된 밀, 보리 등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탈립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작물화된 작물은 종자 휴면이 사라져 심으면 바로 싹이 나는 특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콩, 팥, 완두, 렌즈콩 등 콩과 식물이 도입되었습니다. 사실상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을 보완하는 작물을 선택한 셈입니다. 콩류는 단백질 공급에 도움을 주었으며, 뿌리혹박테리아에 의한 질소 고정 효과를 부수적으로 누리는 계기도 마련했습니다. 재배종 콩 역시 꼬투리가 터지지 않고 콩알을 감싸고 있는 종이 선택되었고, 껍질이 얇고 투과성이 높은 것 또한 선발되었습니다.

3단계에서는 감자, 고구마, 카사바, 토란 등 땅속줄기나 뿌리를 먹는 근채류와 구황작물이 선택되었습니다. 이들은 곡물보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월등히 높고, 기상 재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이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독성이 약화하거나 뿌리나 줄기가 거대해지도록 길들었습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채소와 과수가 도입됨으로써 기호성과 다양성을 충족하는 작물이 추가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오이, 호박, 멜론이나 배추, 무 등의 채소들이 식탁을 다양하게 채울 수 있었습니다. 비타민, 무기질 섭취, 그리고 맛의 다양성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가시와 털이 없는 매끄러운 형질의 가지나 오이가 선택되었습니다.

농작물로 선택된 식물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유전적 변화는 우선 자연 분산 능력의 상실( 스스로 씨앗을 퍼뜨리지 못하고 인간의 손을 거쳐야 함)로 의존성이 높습니다. 농민의 보호 속에서 생장하므로 방어 기제를 상실했습니다.(독성, 가시, 쓴맛 등 천적에 대항하는 화학적/물리적 무기 상실) 그리고 특정 부위가 비대화하여 잎, 열매, 뿌리 등 인간이 이용하는 특정 부위가 야생종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커졌습니다. 이 개량과정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농작물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고, 야생종을 다시 한번 작물화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토종은 형제자매

토종 품종은 ‘순계(Pure Line)’가 아닙니다. 토종은 오랜 세월 동안 엄격한 유전적 통제 없이 재배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키가 비슷하고 열매 모양이 같아 보이지만(표현형의 유사성), 그 형질을 결정하는 DNA 수준의 유전자 조합(유전자형)은 개체마다 제각각입니다. 같은 기능을 다른 유전적 특성으로 달성합니다. 예를 들어, '가뭄을 견디는 성질'을 가진 개체라도 어떤 것은 뿌리를 깊게 내리는 유전자를, 어떤 것은 잎의 기공을 빨리 닫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겉보기엔 똑같이 잘 견디는 것 같지만 내적 대응체계는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집단 내 유전적 다양성입니다. 우리가 종자의 다양성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전적 다양성을 농업에서 고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길고 긴 농경 활동으로 확보한 작물화 식물은 자연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대신 스스로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그저 사라지고 말 토종 종자들입니다.

이근우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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