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7일 신군부 세력의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계엄은 ‘5·18’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했고 광주 시민들은 이에 저항했다. 정부 수립 이래 가장 길었던 440일간의 계엄이 1981년 끝났지만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수년이 더 걸려야 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은 다시 계엄을 선포했다. 순식간에 많은 시민들이 국회를 에워싸고 계엄를 해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6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됐다. 이후 지난 14일 국회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됐지만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목소리가 계속 광장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경향신문 플랫팀은 26일 1980년 광주를 보여주는 ‘열매 모임’과 2024년 서울을 보여주는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을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했다. 지난 5일 열매모임의 김선옥씨(66), 김복희씨(63), 최미자씨(62)를 광주 국립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인터뷰했고 7일부터 ‘윤석열 탄핵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임예슬씨(29)를 24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44년 만에 세상에 모습 나타낸 ‘열매 모임’
서로 연결되어 국회 증언대회까지
국가배상소송 통해 ‘정의’를 보여줄 것
지난 4월 5·18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 10명이 처음 만났고 이들은 ‘열매’라는 이름으로 과거사 성폭력이라는 숙제를 하나씩 풀어가기로 했다. 9월 이들은 자신들의 증언을 듣지 않으려 했던 국회에서 증언대회도 열었다. 1989년 한 피해자의 오빠는 동생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증언해달라고 했지만 당시 야당 국회의원들 등 관련자들은 ‘쟁점 사안이 아니니 진상규명을 위해 시급한 것부터 하자, 너무 끔찍해서 믿어줄 것 같지 않다’며 증언을 만류했다.
35년이 지나서야 열린 증언대회는 이들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말하는 첫 번째 기회였다. 김선옥씨는 국회도서관 강당에 들어설 때 등불을 들고 입장하는 장면이 좋았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말하니 내 안에 있는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300석 규모의 객석에선 훌쩍이는 소리도 났지만 많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국회의원들은 열매 모임 회원들에게 장미 꽃다발을 건넸다. 많은 사람 앞에서 증언했던 경험은 ‘자유’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최미자씨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한다고 증언하고 나니까 홀가분해졌다”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준다는 게, 따뜻하게 안아주고 보듬어준 게 너무 감사했다”고 말했다.
김선옥씨는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에 대해 생각한다. 수사관에게 성폭력을 당했지만 5·18 당시 사망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인생이 꺾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커졌다. 가해자를 쫓거나 뭔가를 잃어버리는 꿈을 꾸면서 분노의 고통으로 오래 힘들었다. 더 늦기 전에 얘기를 하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2018년 ‘38년만의 미투’를 했지만 미투 이후 더 힘들었고 난소암에 걸렸다. 그러나 자신이 남긴 씨앗으로 많은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드러냈고 ‘국회 증언대회’라는 결실을 맺은 것을 보고 “드디어 내가 쏘아올린 공의 효과를 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열매가 함께 길을 가니 길이 열릴 것”이라며 “열매가 단단해지는 것이 내 삶의 의미”라고 말했다.
김복희씨는 열매 대표를 맡으면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마스크를 벗었다. ‘열매’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씨는 이제 열매 모임이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고 했다. 이들은 10월부터 매달 국립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모임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김씨는 “서로를 좀더 알게 되면서 치유해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함께 목소리 내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시작’이다. 김선옥씨는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설 수 있는지 우리가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난 12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는 성폭력 피해자 14명과 피해자를 보살펴온 가족 3명이다. 5·18 성폭력 피해자들의 집단소송은 처음이다. 김복희씨는 “원래 53명이던 피해자들이 다 조사받지 못하면서 16명이 됐다. 16명의 결론이 다 다를 수도 있어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함께 치유하고 소송을 잘 마무리해 “우리가 이겼다”라고 말하는 것이 목표다. 김선옥씨는 “우리는 길을 만들고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피해를 증언하면서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준 게 5·18 정신입니다. 처음엔 길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길이 생긴다고 하잖아요. 과거사 성폭력 사건에서 국가 배상이라는 사례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만큼 귀한 존재들이라 생각해요.”
12·3 비상계엄 사태를 보며 김복희씨는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선옥씨는 “광주의 경험이 있었기에 계엄 해제도 가능했다 본다”며 “이런 일이 다시 안 일어나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여전히 미완인 것”이라고 말했다. “반성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
‘아이돌이나 좋아하던 여자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위해 투쟁하는 여자들’
“응원봉을 가지고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은 응원봉을 가진 사람이 지켜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7일부터 시위에 참여한 임예슬씨(29)는 여자아이들 팬이다. 임씨는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이 주목받은 이유에 대해 ‘의외성’과 ‘반전 효과’를 들었다. ‘빠순이’와 ‘정치’는 엄청난 간극이 있어 보였지만 “응원봉 뒤에 가려져 있던 연대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2030 여성들이 보여준 연대와 의리, 우정, 유대의 모습이 아마 ‘여자들에게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며 “‘빠순이’로 격하됐던 친구나 딸이 사실 엄청난 연대의식과 의리로 뭉친 주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 반전 효과는 엄청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돌이나 좋아하던 여자들’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기에 투쟁하는 여자들’로 사회적 의미가 전환된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들의 끈끈함과 유대는 생각보다 강렬하거든요. ‘촛불은 불면 꺼진다’는 망언을 한 국회의원에게 저항하기 위해 ‘가장 소중하고 꺼지지 않는 불빛’을 들고 나간 여성들이 보여주는 장면이죠.”
시위는 연대의 장이었다. 임씨는 여의도공원의 작은 언덕에서 둘러쳐있던 돌을 넘어가야 했는데 한 여성이 자신의 친구를 먼저 손 잡아준 뒤 뒤에 오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돕는 모습을 봤다. 임씨와 임씨 동생도 도움을 받았다. 임씨는 “응원봉은 말 그대로 ‘당신을 늘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응원’의 상징”으로 “그동안의 투쟁이 머리띠나 굳은 얼굴, 촛불 같은 엄숙함으로 상징됐다면 밝고 활기찬 응원봉이 시위라는 격동의 장소와 상충되면서 더큰 시너지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질서를 지키는 모습에 감동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대응하는 이유가 이태원 참사 이후여서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임씨는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세대”라고 말했다.
2030 여성들이 시위에 많이 나온 이유에 대해 임씨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여성들의 커졌던 좌절감이 이번 시위에 투영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윤석열은 이른바 갈라치기, 여성혐오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라며 “디지털 성범죄가 계속 늘고 여성들을 향한 폭력 사건들도 발생했지만 정부는 역대급 세수펑크로 대응했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 문제도 거론했다. ‘그냥 쉬었다’는 청년 인구의 가파른 증가, 양질의 일자리 부족부터 후쿠시마 오염수 찬성, 장애인 및 소수자에 대한 무시 및 방관 등에 청년들이 불만, 분노가 쌓여왔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선 조금 속상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늘 광장에 나가 소리쳤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간 시끄러우면 시끄럽다고 언론에 뭇매를 맞거나 평화로우면 평화로운대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기후위기 시위, 딥페이크 시위 등 많은 시위에 여성들은 함께 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은 ‘경고’를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임씨는 “‘앞으로 너희들에게 50년간 투표할 사람들’이라는 표어가 인상 깊었다”며 “우리를 무시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경고로 느껴졌고 진정한 사회의 일원으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걸 확인시켜주는 행위가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 “그동안 당신들이 우리 언니들을 무시했고 우리 친구들의 발언도 무시했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종결됐다는 걸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요.”
이제 광장의 목소리를 제도 정치가 어떻게 수렴하는지가 중요하다. 임씨는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시민들의 높아진 수준을 과연 제도 정치가 잘 수렴할 수 있을지 우울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많은 여성들이 시위에 나와 목소리를 내는 것에 “이제 정치권이 눈치를 보지 않을까” 기대한다. “여성들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회를 사랑하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줬으니 정치권도 우리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임씨는 5.18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플랫의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 기사를 읽으며 울었다고 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임씨는 “젊은 여성들이 사실 나도 그런 일을 겪었다고 피해를 공유할 때 돌아보면 우리 엄마 세대 때도 할머니 세대 때도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자연스럽게 연대 의식이 생기죠. 생각보다 오래된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비슷한 일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연대 의식이 생기는 거예요. 오래전 세대의 이야기를 듣고 공유하고 공감할 때 유대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면에서 2024년 시위는 이제 시작이다. 서로 연결되었으니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임씨는 그럼에도 희망을 말했다. “우린 이제 시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