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에 빠진 MZ
MZ세대에서 ‘꾸미기’는 종이 오리기 놀이를 할 때처럼 순수한 작업인 동시에 스스로의 취향을 드러내는 패션 작업이다. 다이어리 꾸미기 ‘다꾸’, 신발 꾸미기 ‘신꾸’, 가방 꾸미기 ‘백꾸’는 MZ 세대를 사로잡은 꾸미기 3대장. 그중에서도 ‘백꾸’는 작고 귀여운 동물 또는 만화 캐릭터 키링의 인기와 함께 ‘무해력’ 트렌드를 견인하고 있다.

#24일 오후 4시 홍대 앞. 학교 정문을 빠져나오는 학생들의 백팩에는 남녀 가릴 것 없이 작고 앙증맞은 키링이 한두 개씩 달랑거린다. “귀엽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 굿즈예요.” “저의 개성을 나타내주는 액세서리들이죠.”
#같은 날 오후 6시 합정역 대합실. 퇴근으로 바쁜 직장인들의 핸드백에도 색색의 동물 모양 키링이 달려 있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같아서 친구와 똑같은 걸 샀어요.” “제가 직접 떠서 만든 곰돌인데 사랑스럽죠
?
” 대합실 한쪽 인형 뽑기 방 앞에 쪼그리고 앉아 키링 뽑기 삼매경에 빠진 이들도 보인다. 손바닥만 한 인형은 1게임에 500원, 품에 안길 정도 크기의 인형은 1게임에 1000원이다.
열쇠 버리고 부활한 키링

올해의 소비트렌드를 전망한 책 『트렌드 코리아 2025』의 다섯 번째 키워드는 ‘무해력(無害力)’이다. 정의는 이렇다. “작거나 귀엽거나 서툴지만 순수한 것들이 사랑받는다. 이처럼 작고 귀엽고 순수한 것들의 공통점은 해롭지 않고, 그래서 나에게 자극이나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며, 굳이 반대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무해함’으로 범주화하고, 이렇게 무해한 사물들의 준거력이 강해지는 현상을 ‘무해력’이라 부르고자 한다.”
작고 귀여운 것들은 늘 사랑받아왔지만 특히 면·털 소재의 동물 또는 인기 캐릭터 인형 등은 만지면 보근 보근, 폭신 폭신, 몽실 몽실한 탄력과 부드러운 촉감을 선물한다. 자꾸만 만지고 싶고,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고. 이점이 바로 ‘무해력’ 아이템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데, 최근에는 백팩과 핸드백을 꾸미는 액세서리로 인기가 높다.

말하자면 요즘 MZ세대에게 키링은 위로도 받고, 취향도 표현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스마트폰·스마트키가 일상화되면서 열쇠(키·key)의 존재감이 없어진 지 오래. 열쇠를 끼워 다니기에 편리한 키링(key-ring)도 사라졌다. 한때 여행지 기념품으로 만만했던 키링이지만 버릴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처치 곤란한 선물이 됐다. 그런데 그 키링이 컴백했다. 열쇠들을 묶어놓는 도구가 아니라 가방에 연결하기 좋은 액세서리 백 참(bag charm·가방 장식)으로 용도는 확 달라졌다.

MZ세대가 즐겨 사용하는 쇼핑 플랫폼 에이블리의 검색 데이터 분석 결과 ‘키링’ 키워드 검색은 2022년부터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22년은 전년 대비 25% 증가했고, 2023년은 전년대비 70% 급증, 2024년에도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했다. 에이블리 관계자는 “고객 수요를 감지하고 지난해 1월 신학기 준비 시즌에 맞춰 플랫폼 내에 ‘인형’ ‘키링’ 카테고리를 신설했다”고 했다.
푸바오 기폭제로 키티·미피 등 인기

2023년은 판다 푸바오의 팬덤이 절정에 이른 해다. 2020년 에버랜드에서 태어난 푸바오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판다로 ‘용인 푸씨’ ‘푸린세스’ 등의 애칭과 함께 최고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 중국으로 반환된 뒤에도 여전히 푸바오에 대한 기사는 관심을 많이 모으고 있다. 뒹굴뒹굴 흙바닥을 구르며 ‘장꾸(장난꾸러기)’짓을 하는 푸바오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미소를 지었고, 위로받았다.
푸바오를 기폭제로 ‘무해력’ 아이템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MZ세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캐릭터들의 인기다. 고양이 ‘키티’를 중심으로 한 산리오의 캐릭터들, 1989년 개봉한 영국의 스톱 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 시리즈 ‘월레스 앤 그로밋’의 영리한 개 ‘그로밋’, 올해 70세를 맞은 네덜란드의 토끼 캐릭터 ‘미피’ 등이다. 이밖에도 지난 1~2월 동안 에이블리에서 인기 높은 키링 제품을 보면 ‘네잎클로버 미니 토끼’ ‘Y2K 다마고치 키링’ 등을 꼽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곰·강아지 인형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특히 나를 위한 위로 ‘힐링’이 컨셉트인 호텔가에서는 MZ세대를 사로잡기 위해 ‘한정판’ 동물 인형과 키링을 적극 이용하고 있다. 일종의 어른들을 위한 애착인형이다. 신라호텔의 ‘신라베어’는 짙은 갈색 곰 인형이 오리지널인데, 2023년부터 그해의 띠에 따라 귀엽게 변신하고 있다. 토끼의 해에는 토끼 모자를 쓰고, 뱀의 해에는 뱀피 넥타이를 메고, 용의 해에는 용의 뿔과 날개를 단 곰을 제작하는데 개당 30만원이 넘지만 인기가 좋다.
그랜드 하얏트 호텔은 지난해 7월 마스코트 강아지 ‘하이(HY)’를 만들었다. ‘하이’라는 이름은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진행된 네이밍 이벤트에서 고객들이 직접 추천한 이름 중 가장 많은 득표를 얻어 최종 선정된 이름으로 호텔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반갑게 인사한다는 의미와 HYATT의 HY에서 따왔다. 재미있는 건 하이를 의인화한 스토리텔링이다. 호텔 20층 스위트룸에서 사는 하이는 매일 아침 남산을 산책하는 펫 친구들과 근황을 나누고, 호텔 내 레스토랑을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호기심 많은 ‘강아지 호텔리어’라는 설정이다. 2022년 8월 부임한 총지배인 피터 힐드브랜드의 아이디어인데 그는 한국 시장의 특징을 “MZ세대 주도하에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로 꼽았다. 또한 “이 MZ세대는 직접적인 체험과 인증을 선호하기 때문에 사람과 가장 친근한 동물이자 한 가족처럼 더불어 사는 강아지 캐릭터를 떠올렸다”고 했다.

독일 명품 브랜드 라이카 카메라는 1925년 대량 생산된 최초의 35㎜ 카메라 ‘라이카 I’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원조 테디베어 브랜드 ‘슈타이프(Steiff)’와 손잡고 특별 제작된 한정판 테디베어 ‘에른스트(Ernst)’와 ‘엘시(Elsie)’를 공개했다. 장인의 수작업으로 각 500개 한정 제작됐는데 가격은 개당 100만원을 호가하지만 미니어처 라이카 카메라로 디테일에 생동감을 더해 라이카·테디 베어 매니어들 사이에선 인기다.
홍대앞과 합정역에서 만난 MZ세대는 동물 또는 만화 캐릭터 키링을 달고 다니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공통적으로 “귀엽기 때문에” “나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포근포근 코바늘 손뜨개 인형』 등 내가 좋아하는 동물 인형을 만들어 키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손뜨개 책을 여러 권 출판한 한스미디어의 이나리 편집장은 “최근 1년 사이 나온 뜨개책의 연령별 판매량 비율은 20대가 30%, 30대가 40%, 40대가 30% 정도”라며 “손뜨개 인형이라고 하면 과거에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아이들의 장난감 정도로 생각됐지만 요즘은 2030세대가 직접 만드는 백꾸 액세서리로 컨셉도 타깃도 바뀌었다”고 했다. 이 팀장은 “코로나 이후 달라진 현상인데, 예전에는 모자·조끼·스웨터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손뜨개를 이용했다면 요즘은 동물·꽃 등 컬러나 모양을 자기 취향대로 창조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면서 자기표현의 도구로 생각하는 젊은 층이 많다”고 했다.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선 ‘무해력’ 트렌드의 원인을 “요즘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유례없는 불경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념·계층·성별·세대 등 정치·사회적 갈등은 심화되고 경쟁도 치열해지는 가운데 무해함은 하나의 심리적 안전지대를 만들어준다”는 것. 지나치게 심각한 해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MZ세대는 무채색 가방에 알록달록 포인트를 만들어주고,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짓게 만드는 ‘무해력’ 가득한 아이템들로 위로도 받고, 남다른 자신만의 개성 표현에도 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