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탕, 옛날통닭, 순대···’
텔레그램 단체 대화방에 실시간에 올라오는 음식 사진에 수사관들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총책 A씨는 자신이 왕처럼 군림하던 이곳 대화방에 음식 사진을 올리며 피해 여성들과 대화를 나눴다. 피해 여성들은 A씨를 여성으로 착각하고 ‘주인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경찰은 이 방에 올라온 음식 사진과 포장 용기, 바닥에 깔린 장판 등을 단서로 삼아 A씨 행적을 추적했다. 배달음식 포장지와 장판 패턴을 분석하고, 음식점들을 일일이 찾아가 수소문했다. A씨가 올린 산책로 사진에 등장한 나무와 돌담 종류를 파악하려고 조경업체를 찾기도 했다.
남양주, 구미, 부산 등 여러 곳을 특정해 찾아갔지만 경찰은 번번이 허탈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A씨가 피해자들에게 받은 ‘일상 보고’ 사진을 올린 것이었다. 조승노 경감은 “작년 내내 음식 사진만 쳐다보고 산 것 같다”면서 “단서가 부족해 못 잡겠다는 마음도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조직적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 집단인 일명 ‘자경단’ 총책 A씨(33)를 포함한 일당 54명을 검거한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2대 3팀 수사관들을 지난 24일 만났다.
지난해 8월 텔레그램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파벨 두로프가 프랑스에서 체포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사용자 프라이버시와 보안을 중시하는 텔레그램은 그간 세계 각국 수사기관들의 수사 협조에도 거부해왔을뿐더러, 공식적으로 문의 가능한 창구도 없다.
본사가 있는 미국 내 수사에도 일절 협조하지 않았던 텔레그램을 움직인 건 바로 수사관들의 끈기였다. 텔레그램 측이 유일하게 연락을 열어둔 창구는 ‘보안 문제’가 발생했을 시 연락할 수 있는 메일 주소뿐이었다. 수사팀은 이곳에 몇 달에 걸쳐 끈질기게 메일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건 “보관하는 자료가 없어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답장뿐이었다.
텔레그램 CEO 체포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수사팀은 텔레그램 측에 “성폭력 방조로 당신들의 CEO가 한국 경찰로 입건될 수도 있다”며 강력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텔레그램 측 태도가 달라졌다. 상시 연락 가능한 핫라인을 공유하고, 한국 경찰에 먼저 만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후 수사팀이 본사·서버 소재지를 모두 확보해 영장을 집행하자 비로소 추적할 단서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총책 A씨는 텔레그램을 기반으로 성착취 범죄집단 ‘자경단’을 조직해 2020년 5월부터 2025년 1월까지 남녀 피해자 총 234명(10대 159명)에게 가학적 성착취 범죄를 저질렀다. 피해자들에게 ‘1시간마다 일상보고’, ‘반성문 작성’ 등을 시키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이를 어기면 나체촬영 또는 자해를 하도록 강요했다. 여성 피해자들을 자신 또는 부하 조직원과 성관계를 하도록 강요해 촬영했고, 남성 피해자들에겐 신상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해 범행에 끌어들였다.
A씨는 장기간에 걸쳐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했다. 신상정보 등 약점이 잡힌 피해자를 다시 조직원으로 포섭하며 조직을 확장했다. 그는 스스로를 ‘목사’라고 부르게 하고 그 밑에 집사·전도사·예비 전도사 등 직책을 둬 피라미드형으로 조직을 유지했다. 철저한 상명하복 구조 속에서 A씨는 왕처럼 군림했다.
A씨가 처음 범죄에 발을 담근 건 2020년 5월이었다. ‘N번방’, ‘박사방’ 사례를 보면서 범행을 연구한 A씨는 지인 딥페이크 합성물에 관심을 보인 한 남성의 신상정보를 약점 잡아 ‘노예’로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범행에 흥미를 붙인 A씨는 이후에도 지인 딥페이크 합성물에 관심을 보인 남성, 성적인 호기심으로 접근한 여성의 신상 정보를 캐내 이를 유포하겠다며 협박했다. 그러다 A씨는 피해자들에게 주변에 ‘전도’ 하라면서 범죄를 점차 조직화했다.
A씨를 직접 대면한 조 경감은 ‘잘못 특정했나’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30대 직장인의 모습이라 범죄 용의점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A씨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해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소개로 번듯한 직장에도 들어갔다.
N번방을 만든 성범죄자 ‘갓갓’(문형욱)이 여성에 대한 성적 학대를 목적으로, ‘박사방’ 주범 조주빈이 주로 돈벌이를 목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A씨는 남녀 모두를 범죄 대상으로 삼았고 금전적인 목적은 전혀 없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A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 “(사람들이) 내 통제와 지시를 얼마나 잘 따르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특정한 성적 지향을 가진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검거와 조사 과정에서도 A씨는 큰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는 게 조 경감 설명이다. A씨는 지난 24일 성동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송치되면서도 묵묵부답이었다.
경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A씨는 “수사하러 헛고생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라며 경찰을 조롱하기도 했다.
조 경감은 “언젠간 잡힐 사람이니까 귀여운 수준으로 여겼다”면서도 “사실 박사방 수사를 할 때도 조주빈이 경찰들더러 ‘텔린이’(텔레그램+어린이)라며 놀렸는데 난 그날부터 집에 안 들어갔다”고 했다.
사이버 수사 기법이 진보하는 만큼이나 범죄자들의 수사 회피 수법도 날로 진화했다. 경찰이 주거지에 들이닥쳐도 PC 전원을 끄면 곧바로 자료가 삭제되거나 본체를 열어볼 수 없도록 록(lock)이 걸리게끔 설정한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보통신기술(IT) 활용 능력만이 관건인 것은 아니다. 불법촬영·성착취물 등을 수사하는 성폭력 전담팀인 3팀의 모습도 흔히 사이버 수사대를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화이트 해커’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사이버 수사대에선 사이버 수사 요원으로 경력채용하기도 하지만 3팀에는 경력채용된 수사 요원도 없다.
의외로 마약반 출신 수사관들이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조 경감은 “결국 사람을 잡아야 하는 만큼 CCTV를 열어보는 게 중요한데 이건 강력계 수사관들이 잘한다”면서 “사이버 공간 추적 기법은 배우면 되는 것이고 결국 얼마나 끈질기게 추적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직접 미성년자를 강간하러 나섰다가 폐쇄회로(CC)TV에 찍힌 A씨 모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못 잡았으면 이번 설에도 어디 못 가는 거죠”
자경단 사건은 베테랑 수사관들에게도 충격으로 남을 정도로 그 잔혹성이 높았다. 조 경감과 방 경장은 “사이버성범죄 사건 중 가히 최악으로 가학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방 경장은 “검거 후 증거물을 압수해 살펴보니 추적 중에 확보한 증거물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A씨를 검거하면서 수사팀도 마음의 짐을 덜어냈다. 조 경감은 “이런 잔혹한 성범죄는 못 잡을 때 다가오는 충격감이 훨씬 크다”면서 “못 잡았으면 이번 설에도 어디 못 갔다”고 말했다.
사건 해결 소감을 묻자 조 경감은 “우리 팀원들 잠이나 좀 재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3팀이 본격적으로 수사를 착수하기 시작한 지난해 초부터 약 1년 간 서울경찰청 2층 수사팀 사무실은 불이 꺼질 날이 없었다. 기자가 수사팀 사무실을 찾은 지난 24일에도 팀은 여죄를 찾기 위한 포렌식 분석으로 분주했다.
사이버조 경감은 “누구나 순간적으로 실수할 수 있으니 온라인 공간에서 설령 약점이 잡혔더라도 주변 사람과 상담하고 수사기관에 적극 신고해야한다”면서 “범죄자가 ‘경찰에 신고하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할 때부터 범죄가 늘어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