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악한 귀향길, 시베리아 억류자 피해보상과 과제

2024-10-10

기획취재: 잊힌 현대사, 시베리아 억류의 기억과 기록

1. 강제동원 피해자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들

2. “교사도 징병” 관동군에 끌려간 울산 사람 이규철

3. 철모도 소총도 없이 전쟁터로, 전차 격파 자폭 훈련

4. 기아, 혹한, 중노동…셀레트칸과 오렌부르크의 노예

5. 험악한 귀향길, 시베리아 억류자 피해보상과 과제

6. 러시아 공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독립운동가 한문해

[울산저널]이종호 기자= 귀환자들을 싣고 1948년 11월 28일 나홋카항을 출발한 노보시비르스크호는 다음 날 저녁 흥남항에 입항했다. “배 안으로 새하얀 이밥을 날라 들어왔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쌀밥이다. 반찬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100쪽) 배 안에서 이틀을 기다려 12월 1일 정오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은 2300여 귀환자들은 흥남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교실과 강당에 임시 숙소를 마련한 흥남여고에 수용됐다. 그곳에는 개인별로 요와 이불, 베개가 가지런히 준비돼 있었다. 하루 세 끼 식사가 지급됐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군악대 위안 공연과 영화를 관람하고 흥남비료공장도 견학했다.

흥남항이 아니라 다른 경로로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부상 때문에 일본인들과 함께 1948년 5~7월 일본 교토 마이즈루(舞鶴)항으로 일찍 귀환한 김종빈, 김성안, 황규형 등 6명과 1949년 10월 소련 마가단항에서 북한으로 직접 들어온 크라스노야르스크 기관차 공장 소속 포로 83명이 그런 경우다. 나관국, 동완, 이후녕은 1949년 10월 두만강 나무다리를 건너 육로로 돌아왔고, 방선은 1950년 4월 다른 이들보다 늦게 북한 웅기항으로 귀환했다.

귀환하지 않고 소련에 남은 류학구나 고성만 같은 이도 있다. 류학구는 1990년 노태우-고르바초프 한소 정상회담의 통역을 맡은 것이 계기가 돼 국적을 회복하고 한국에 정착했다. 하바롭스크 방송국에서 한국어 방송 아나운서를 하던 고성만은 1991년 MBC 취재팀과 함께 온 이규철을 만났다. 이창석은 1953년 마이즈루항으로 귀환해 남과 북 중 어느 한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아 ‘자이니치’가 됐다.

흥남여고에 수용돼 있던 귀환자 중 만주 출신 1000여 명이 먼저 풀려났다. 이어 북한 출신 800여 명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한 출신 500여 명은 지역별로 조를 나눠 기차를 타고 연천으로 간 뒤 그곳에서 한탄강을 건너 38선을 넘었다. 이규철을 포함한 50여 명은 1949년 2월 4일 기차로 연천에 도착했다. 고향까지 갈 여비를 받고 이튿날 아침 얼어붙은 한탄강을 건넌 이들은 남한 경비대에 체포돼 파주경찰서로 연행됐다.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이 아닌지 한 사람씩 호출돼 밤늦게까지 취조당했다. 아침과 저녁 두 끼 탁구공만 한 밀밥 한 덩어리를 먹고 밤에는 쌀가마니를 뒤집어쓰고 잤다.

나흘 뒤 인천 송현동 전재민 수용소로 옮긴 귀환자들은 해안 창고 바닥에 가마니를 깐 천막에서 출신 도별로 수용돼 한국군 정보부대와 경찰, 미군 방첩대(CIC) 등의 조사를 받았다. 전재민 수용소에서 풀려난 건 두 달 반만인 1949년 4월 24일. 경남 출신 10여 명과 부산으로 내려온 이규철은 이곳에서도 난민수용소에 1주일간 수용됐다 5월 1일에야 자유의 몸이 됐다. 부산에서는 헌병대(지금의 보수초등학교)에 끌려가 서북청년단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규철은 몇 년 동안 밤마다 시베리아의 악몽에 시달렸다. “귀국 열차를 타고 내린 곳은 역시 시베리아 오지였고 스카레이(더 빨리)라고 재촉하는 캄보이(감시병)의 매서운 소리에 놀라서 깨어보면 식은땀에 옷은 젖어 있었으며 가슴의 고동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날이 가고 해가 바뀜에 따라 악몽의 빈도도 줄어들었다. 동상에 걸렸던 오른쪽 발가락은 겨울에는 아리고 여름에는 가려워서 괴로웠으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난 후 통증은 가라앉았다.”(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110쪽)

이규철은 태화공립국민학교(울산초등학교, 현 울산시립미술관 옆 울산객사 터)에 교직을 구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태화국민학교는 제18육군병원이 됐다. 하루는 오렌부르크에서 같이 고생했던 동료 한 명이 눈을 다쳐 붕대를 감고 들어왔다. 관동군 당시 군조(軍曹, 중사)였던 서00이었다. 군복 차림으로 지나가는 시베리아 동료 장백용도 만났다. 이규철은 “시베리아에서 구사일생으로 돌아와서 겨우 1년이 지난 오늘 또다시 6.25에 참전하게 되다니. 북한에 남은 동료들도 인민군으로 참전했을 것이 아닌가. 결국은 시베리아 동료끼리 교전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고 탄식했다.

적성국 소련 억류 사실 숨기며

‘버림받은 백성’으로 40여 년

험난한 귀환길에 한국전쟁까지 겪은 남한 출신 시베리아 억류자들은 적성국에 체류했다는 사실 때문에 요시찰 인물로 분류돼 사찰 기관의 감시를 받았다. 1987년 민주화와 1990년 한소 수교로 냉전 분위기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기 전까지 이들은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소련에 포로로 억류됐던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시베리아 조선인 일본군 포로 문제 연구>(2018)을 쓴 김수용은 “제국-식민지 체제에서 냉전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로 귀환한 포로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분단 경험, 한국전쟁을 거쳐 반공이 국시가 된 조국에서 점점 배제되고 망각된 ‘기민(棄民)’이 되어갔다”고 했다.

부산 수미초등학교 교감을 끝으로 교직을 퇴임한 이규철은 1991년 일본 시민단체의 후원을 받아 69쪽짜리 일본어 필사본 수기 <조선인 전 일본병 시베리아 포로기(朝鮮人元日本兵シベリア捕虜記(1945.8~1949.5))>를 비매품 한정판으로 600부 출판했다.

그해 10~11월 그는 MBC 다큐멘터리 촬영팀과 함께 하얼빈, 밀산, 무단장, 베이안, 쑨우, 헤이허, 블라고베셴스크, 셀레트칸, 오렌부르크, 하바롭스크, 나홋카를 40여 년 만에 돌아봤다. MBC 특별기획 <시베리아 한의 노래>는 1992년 8월 21일 1부와 2부로 나눠 방영됐다. 이규철은 일본어 수기에 일본군 포로들의 체험담과 MBC 회상 탐방을 추가해 1992년 <시베리아 한의 노래>를 한글로 다시 썼다. 그의 필사본 수기는 정식 출판되지 않았다.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서해문집, 2009)를 쓴 김효순은 “일본 국회도서관에도 등록된 수기가 한국의 국회도서관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며 “안타까운 일이지만 시베리아 억류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그만큼 방치돼 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이규철은 2005년 1월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규철의 관동군 강제징병, 시베리아 억류, 귀환 경로

울산 병영 출신으로 울산공립농업학교 1기 졸업생인 이규철은 1943년 9월 말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동양음악학교에 다니다 1944년 1월 말 귀국했다. 1944년 2월 2일 경부선에서 경원선으로 갈아타고 함경선을 거쳐 두만강을 건넌 이규철은 무단장-자무스선을 타고 린커우에 도착해 국경선승차허가권을 발급받은 다음 밀산(동안)에 도착했다. 밀산 배제국민우급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1945년 4월 1일 제2기 징병검사에 갑종 판정을 받아 5월 말 길림성 수란현 막석훈련소에서 2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8월 7일 밀산을 출발, 무단장, 하얼빈을 거쳐 8월 9일 베이안에서 관동군 아베부대에 입대했다.

베이안에서 전쟁터인 쑨우 진지로 배치된 이규철은 소련 전차 격파 자폭 훈련을 받다 8월 17일 관동군이 항복하면서 진지에서 내려왔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 이규철은 8월 말 철로를 수리하면서 북으로 행군해 9월 3일 헤이허에 도착했다. 9월 4일 아침 헤이허에서 배를 타고 소련 블라고베셴스크로 넘어간 이규철은 기차를 타고 9월 6일 셀레트칸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1946년 5월 7일 셀레트칸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20일 동안 이동해 5월 26일 오렌부르크에 도착한 이규철은 이곳 포로수용소에서 2년 5개월 동안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1948년 10월 7일 오렌부르크를 출발한 이규철은 노보시비르스크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셀레트칸을 지나 10월 27일 하바롭스크 380수용소로 옮겨져 2300여 명의 한국인 포로들과 함께 수용됐다. 11월 27일 하바롭스크를 떠난 이규철은 11월 28일 나홋카항에서 귀국선을 타고 11월 29일 흥남항에 도착했다. 1949년 2월 4일 흥남을 출발해 연천에 도착한 이규철은 경남 출신 동료들과 함께 2월 5일 얼어붙은 한탄강을 건너 3.8선을 넘었지만 경비대에 체포돼 파주경찰서로 끌려갔다. 2월 9일 인천 송현동 전재민 수용소로 옮긴 이규철은 4월 24일까지 조사를 받은 뒤 부산으로 내려왔지만 이곳에서도 난민수용소에 1주일간 수용됐다 5월 1일에야 풀려나 울산으로 돌아왔다. 험악한 귀향길이었다.

‘시베리아 삭풍회’와 일본 전억협

살아남은 시베리아 억류 귀환자들은 1990년 6월 한소 수교 이후 알음알음 모이기 시작했다. 1991년 12월께 ‘시베리아 삭풍회’를 결성하고 신문에 광고를 내 흩어져 살던 동료를 모았다. 회원은 60여 명으로 늘었다. 외무부에 협조를 요청해 러시아 정부로부터 노동증명서를 받는 일부터 시작했다. 포로의 임금은 사역한 국가가 발급한 노동증명서를 바탕으로 포로 소속국이 지급하도록 하는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 제네바협약(제3협약)’ 제66조에 따라 미불임금 지급과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노동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3년 33명, 1995년 17명, 1997년 5명이 이름과 국적, 노동기간, 임금 잔액 등이 표시된 노동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이 시기 일본 ‘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전억협)와 교류가 시작됐다. 삭풍회와 전억협은 서울과 도쿄, 모스크바 등에서 국제 세미나를 열며 교류했고, 2004년 일본 의사당 앞에서 함께 연좌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2009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식’에도 전억협 대표단이 참석했다.

삭풍회는 1994년 2월 김영삼 정부에 진정서를 보내 정착금 지급, 일본 정부에 억류 기간 중 군인 봉급과 미지급 노동임금 지급 주선, 러시아 정부에 노동증명메달 요구, 정신적‧육체적 피해보상 지원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6개월 뒤 받은 외무부 회신은 실망스러웠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군인 봉급과 노동임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어렵고, 정착금도 삭풍회가 일본 정부와 논의할 사항이라는 답신이었다. 삭풍회가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면 가능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삭풍회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소송을 제기하고 나서도 한국 정부가 이렇다 할 지원을 한 적은 없었다.

1998년 4월 김대중 정부에도 일본 정부의 정신적‧육체적 피해보상과 사과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소련 억류 기간의 노동임금 잔액을 한국 정부가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한 해 전 전억협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미지급 임금 소송에서 최종 패소해 일본 정부가 보상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한국 정부에 요구한 것이다. 외교통상부는 7개월 뒤 삭풍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답했다.

1999년 10월 삭풍회는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일본 총리에게 피해보상 요청서를 보내 진정한 사죄와 군인 봉급, 위로금, 미불임금 지불, 정신적‧육체적 피해보상, 한국인 사망자 명단 통보 등을 요구했다. 요청서 말미에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보상이 끝났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맞서 “억류자들의 피해는 1945년 이후에 발생한 것이므로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문구를 덧붙였다.

2001년 1월 삭풍회에 팩스로 전달된 답신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말소됐고, 위로금은 1988년 8월 1일 현재 일본국적으로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지급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노동임금에 대해서도 1949년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작성되지 않았고, 포로의 소속국이 임금을 지불한다는 협약 66조의 내용이 당시 국제법으로 확립됐다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조항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회신했다.

2003년 6월 삭풍회 생존자 30명과 유족 한 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전후 보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2006년 기각됐다. 도쿄고등재판소도 소송단의 항소를 기각했다. 2009년 11월 상고했지만 2011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했다.

일본 정부는 1947년 12월에 제정된 미복원자급여법에 따라 1953년 8월까지 귀환자들에게 억류 기간 군인 급여를 지급했다. 1988년에는 평화기념사업특별기금등에관한법률을 제정해 ‘위로금’의 형태로 기금을 마련하고 평화기념사업을 실시했다. 억류 피해자들은 여행상품권 10만 엔과 기념패나 기념품을 받았다. 전후 보상을 민간이 주도하는 방식은 다른 나라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김수용은 1995년 민간 모금을 기반으로 한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에게 위로금을 지급한 것도 큰 틀에서 보면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1997년 소송에 패소한 전억협은 입법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2010년 전후강제억류자특별조치법안이 통과돼 ‘전후 강제노동을 위로하기 위한 특별급부금’이란 명목으로 억류 기간에 따라 25만 엔에서 150만 엔이 지급됐다. 6만8000여 명이 1인당 평균 28만 엔을 받았다. 법 시행일인 2010년 6월 16일 이전 사망자와 일본 국적이 없는 한국인, 외국인 피해자는 제외됐다. 만주와 북한에 수용됐던 억류자들도 급부금을 받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전쟁 피해에 대해 자국민이라도 보상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전쟁 피해란 국민이 다 같이 참고 견뎌야 하는 피해이기 때문에 보상할 수 없다는 전쟁수인론(戰爭受忍論)이었다. 이에 대해 김수용은 “자국의 침략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형성된 희박한 피해자 의식은 타국민에 대한 아픔에 대해 무신경으로 반응하는 희박한 가해자 의식으로 귀결된다”며 일본인의 전쟁관에 내포된 왜곡을 검증하는 것이 ‘전쟁수인론’을 주장하는 일본 정부의 국민에 대한 전쟁책임을 온전하게 밝혀내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억협은 2011년 5월 해산했다.

삭풍회의 아들 문용식

한국에서는 삭풍회의 노력으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강동위) 조사 결과에 따라 신청자들에게 지원금이 지급됐다. 지원금은 사망자나 부상자에게 지급하는 위로금과 부상자에 대한 의료지원금, 미지급 급료 등에 대한 미수금 지원금(1엔당 2000원 환산) 등이었다. 하지만 귀환 후 사망한 피해자는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에관한특별법 적용에서 제외됐고 미수금은 공탁금 기록에 없다는 이유로 기각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삭풍회는 강동위 조사가 마무리된 이듬해 2012년 2월 발족 22년 만에 해산했다.

삭풍회는 해산하고 시베리아 억류 당사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의 권리 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90수용소에 억류돼 탄광 노동에 시달리다 귀환한 문순남의 아들 문용식은 1974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의 비극적 역사가 잊히지 않게끔 러시아, 일본, 한국 정부를 상대로 끈질기게 싸워왔다. 삭풍회 회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이 남긴 자료를 모았고, 2세들의 연락도 도맡았다.

문용식은 시베리아 억류 문제뿐 아니라 BC급 전범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활동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에 포로 감시원 등으로 동원된 조선인 중 148명이 전후 연합국 전범 재판에 BC급 전범으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가운데 23명이 처형됐다.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1955년 동진회를 결성해 일본 역대 총리들에게 처우 개선과 피해보상을 호소하는 요청서를 제출했고, 1991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의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1999년 최종 패소했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입법적 해결을 권고했다. 2008년 일본 중의원에 ‘특정연합국재판 피구금자 등에 대한 특별급부금의 지급에 관한 법률안’이 제출됐지만 제대로 심의되지 못한 채 2009년 폐기됐다. 한국에서는 2006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조사규명위원회가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에 대한 진상조사를 실시해 피해 신고를 접수한 86명 중 83명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했다. 문용식은 아리미쓰 겐(有光健) 시베리아억류자지원·기록센터 대표와 연대해 한일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의 입법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6월 도쿄 와세다대학에서 만난 아리미쓰 겐은 내년 전후 80주년을 계기로 2010년 전후강제억류자특별조치법 특별급부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 조선과 대만인 시베리아 억류자들과 유족들에게도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의원들을 대상으로 입법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이즈루항을 통해 귀환한 대만인 시베리아 억류자의 손자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면서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중에 한국인과 대만인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일본 젊은 세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마이즈루 귀환자 명부에 조선인과 대만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아 있는 쟁점(爭點)들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사법 소송은 일단락됐지만 법률상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일본은 시베리아 억류자들이 대부분 ‘1949년 제네바협약’ 비준(일본 1953년, 한국 1966년) 이전에 귀환했기 때문에 적용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1907년 육전(陸戰)법규판례에관한협약(헤이그협약)을 비준한 일본이 ‘1929년 제네바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1949년 제네바협약’을 1953년에 비준했다고 하더라도 전후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이미 ‘1929년 제네바협약’을 국제관습법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국제관습법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돼 왔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인의 모든 청구권이 해결됐다는 주장에는 “한일협정으로 소멸된 것은 한국의 외교적 보호권에 지나지 않고 국가 간 협정에 의해 해당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까지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반박이 가능하다. 한일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가 제정한 대일민간청구권신고에관한법률은 대일 민간청구권을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권리로 한정하고 있다.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소련에 억류됐기 때문에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특히 제네바협약 6, 7조는 어떠한 특별 협정도 포로의 지위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거나 포로에게 부여하는 권리를 제한해서는 안 되고, 포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특별 협정에 의해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1953년 제네바협약에 가입한 일본이 1965년에 체결한 한일협정으로 한국인 포로들에게 부여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도 1966년 제네바협약에 가입했지만 제네바협약이 이미 국제관습법의 일부가 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2012년 5월 24일 일본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피고로 하는 일제 강제징용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한 해결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청구권으로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동포의 손해배상권뿐 아니라 국외 강제동원으로 인한 부상자나 생환자의 손해배상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김수용은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한 사법 소송은 현재 일단락됐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사건의 판결에 대한 소송과 법률적 쟁점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면서 “그동안 법적 소송에서 드러난 법률적 쟁점을 정리해 향후 이어질 사법 투쟁에서 한일 양국의 책임 이행을 효과적으로 추궁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2025년 광복 80주년 맞아

억류 사망자 유해 수습부터

2004년 이병주 시베리아 삭풍회 회장은 강동위에 조사요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서에서 이병주는 정부에 아홉 가지 질문을 던졌다. △소련이 포츠담 선언 제9항에도 조선인이 포함된 일본군을 억류한 배경은 무엇이며 일본 정부는 왜 이를 방기했는가. △강제동원된 일본 관동군에서 복무한 조선인의 총수는 몇 명인가. △전쟁 말기 소련군과 교전 중 일본인 지휘관의 명령으로 ‘폭사’한 조선인 총수는 몇 명이며 이들의 인정사항은 어떻게 되는가. △무장해제될 당시 일본이 소련 측에 전달한 명부에 조선인을 ‘일본’ 국적으로 등재한 까닭은 무엇인가. △시베리아에 억류된 조선인 총수는 몇 명이며 수용된 장소는 어디인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한 조선인 수와 인적 사항, 사망 장소는 어디인가. △시베리아에서 생존 귀환한 조선인은 몇 명인가. △시베리아 수용소의 강제 노역으로 받은 ‘노동증명서’에 명시된 미불임금은 어느 나라에서 지급받아야 하는가. △한일협정으로 인한 청구권은 시베리아 억류 문제와 관계 없기 때문에 개인청구권을 통한 보상 청구가 가능하지 않은가.

이병주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조사 작업을 벌였던 강동위는 해산했다. 관련 연구도 중단되다시피 하면서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 문제는 점점 잊힌 현대사가 됐다. 내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잊혀가는 시베리아 억류의 ‘기억’을 되살리고 새롭게 ‘기록’하는 작업이 절실한 건 이 때문이다. 시베리아에 억류됐다 목숨을 잃은 70명 안팎의 한국인 포로 사망자들과 매장지를 파악하고 유해를 수습하는 일은 이병주의 질문에 대한 정부의 못 다한 답변들을 채워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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