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꼼꼼하지만 더디게 가는 일본

2025-03-30

한국선 단번에 처리할 일들

일본선 며칠로 나눠서 진행

문제 최소화·분쟁 대비 의도

급변 시대속 유연성은 부족

넷플릭스 드라마 ‘도쿄 사기꾼들’에는 부동산을 매수하려는 쪽이 매도인을 상대로 각종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생년월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띠인가요”, “이 두 사진 중 댁은 어느 쪽인가요”, “댁 근처 어느 슈퍼에서 장을 보십니까”.

면허증, 납세 증명서 등 관련 서류를 이미 제출받아 검증까지 했으면서도 상대가 진짜 소유주가 맞는지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한참 전에 봤던 이 장면이, 도쿄 특파원 부임 준비를 하면서 여러 차례 떠올랐다. 관광이 아닌 장기 체류를 목적으로 일본에 오게 되자 드라마 속 일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첫 번째는 살 집을 구하면서였다. 입주 신청 서류에는 인적사항과 재류자격, 재직증명, 소득내역 등도 모자라 현지에서 긴급 연락이 가능한 사람의 연락처와 생년월일, 소득액까지 적어서 제출해야 했다. 신청을 마치자 부동산 관리회사와 보증보험회사에서 잇달아 전화가 걸려왔다. “이름과 생년월일부터 확인하겠다”더니 직장명과 입국 날짜 등을 물은 뒤 소득을 월 기준, 연 기준으로 꼬치꼬치 확인했다. 긴급 연락처, 한국 내 보증인에게도 비슷한 전화가 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임차인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봐 보증보험을 드는데, 반대로 월세 문화인 일본에서는 집주인이 임대료를 제대로 못 받을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보증보험을 들고 보험사가 임차인을 상대로 이처럼 꼼꼼하게 심사를 진행한다.

게다가 그 과정이 길기까지 하다. 입국 열흘 전 입주 신청을 했는데, 보험사 두 곳 심사를 모두 통과했다는 연락은 입국 열흘 뒤에야 받았다. 이제부터 에어컨 소독, 배관 청소 등 기본적인 수선·유지 작업을 하고 나면 양측 확인을 거쳐 계약하고 입주하는 데까지 20일가량이 더 소요된다고 한다. 미리 인터넷 설치 신청을 했더니 “입주일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늦어지더라도 임시로 쓸 공유기를 보내주니 걱정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점이 바로 이런 속도 감각이다. 한국에서라면 단번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여기서는 며칠로 나눠서 하게 된다. 일본 거주 전력이 없는 외국인이어서 더 그런 것 같다. 계좌를 트러 은행에 갔더니 “첫 개설이냐”고 묻고는, 다른 고객이 한 명도 없는데도 “예약을 하고 오라”며 돌려보낸다. 예약을 하고 간 다른 은행에서는 “심사에 들어가면 2주쯤 후 통장과 카드가 나온다”고 했다.

진행이 이렇게 더딘 것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신중하고 철저하게 절차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현재 임시 거처 계약서에는 퇴거 후 ‘원상복구비’ 청구의 기준이 국토교통성 지침에 따라 세세하게 적시돼 있다. 바닥 변색·마모가 ‘장시간 햇볕 노출·건물의 구조적 결함 등’ 때문이라면 소유주 책임, ‘커피 등을 흘렸거나 물건을 옮기다 생긴 것’이라면 세입자 책임, 이런 식이다.

문제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혹시 모를 분쟁에 대비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전세 사기로 고충을 겪은 한국의 후배들, 세입자가 월세 보증금을 다 소진한 뒤에도 세를 안 내고 버티자 보증금을 다 돌려주고서 내보냈다는 지인의 사례가 떠올랐다. 일본처럼 사전에 꼼꼼하게 따져보는 과정이 있었더라면 이런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반면 절차를 중시하는 일본 문화를 두고, 개개인의 위치와 역할이 명확한 특유의 ‘수직적 사회 구조’에서 원인을 찾는 전문가도 있다. 서로가 규칙을 잘 지킬 땐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나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상에 대응하는 유연성은 부족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개인적으로도 각종 심사 결과를 기다리다 지칠 때면 과연 확인·검증 때문인지 내부 결재에 드는 시간 때문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다시 ‘도쿄 사기꾼들’. 드라마 속 부동산 소유주는 사실 남의 땅을 몰래 제3자에게 팔아넘기는 지면사(地面師) 집단이 집주인과 비슷한 연령·외모 소유자를 섭외해 교육한 ‘배우’였다. 각종 서류도 정교하게 위조한 ‘가짜’였다. 게다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2017년 대형 건설사 세키스이하우스를 상대로 일어난 55억엔(약 540억원) 규모 사기 실화가 드라마 배경이 됐다.

유태영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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