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인 1942년 어느 날 경성방송국(KBS 전신)의 기술직원 성기석은 직접 만든 단파 수신기의 다이얼을 돌리다 우연히 한국어 방송 전파를 잡았다. 방송은 ‘자유의 종은 울린다’는 제목으로 매일 밤 애국가와 함께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해 30분가량 진행됐다.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미국의소리(Voice of America·VOA)’가 1942년 8월29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조선에서 모든 외국 단파방송 청취를 금지하고 고성능 수신기도 통제했다. 신문과 라디오는 일본군의 승전보 일색이었다. 그러나 VOA를 통해 미드웨이 해전 참패 등 날로 기울어가는 일본의 전황이 소개됐다. 이런 소식은 VOA 방송을 몰래 듣던 방송국 직원들을 통해 조금씩 밖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그해 12월 일제 경찰의 대대적 단속으로 방송국 직원, 학생, 언론인 등 200명 넘게 체포됐다. 7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6명은 옥사했다. 이른바 VOA 단파방송 수신 사건이다.
미국 정부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2월1일 독일어로 VOA 방송을 처음 시작했다. 독일 나치 정권 내부를 교란하고 미국 입장을 알리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VOA는 현재 48개 언어로 ‘미국식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4일(현지시간) 글로벌미디어국(USAGM)의 조직과 인력을 대폭 줄이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VOA 방송이 83년 만에 존폐 위기에 몰렸다. USAGM 산하에 운영되고 있는 VOA, 자유아시아방송(RFA), 자유유럽방송(RFE) 등 6개 매체의 대다수 직원들이 휴직 처리됐다. 당장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VOA 방송이 중단됐다.
트럼프가 USAGM을 축소시킨 명분은 연방정부 구조조정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VOA 등 공영매체들이 자신의 정책과 치적을 홍보하기는커녕 비판만 한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을 보면, ‘손보기’ 차원일 수 있다. 이에 전국기자협회 등 미국 언론단체는 트럼프의 언론자유 위협을 비판하는데 중국 관영매체들은 ‘거짓말 공장이 사라지게 됐다’며 환영한다니, 씁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