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날·어버이날·부부의날…. 5월은 가족이 함께할 기념일이 많다. 하하 호호 웃을 일만 가득하면 좋으련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연 없는 집은 없다. 영화 ‘장손’(감독 오정민, 2024년)은 경북 시골 마을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대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가장 복잡한 공동체,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속절없이 아름다운 농촌의 여름과 가을, 겨울을 배경으로 말이다.

영화는 바삐 움직이는 두부 공장에서 시작된다. 하얀 김이 시야를 가리고, 물 빠지는 소리와 함께 위생모를 쓴 일꾼들이 부지런히 두부를 옮긴다. 이곳은 김씨 집안의 가업으로 이어온 두부 공장. 두부판 하나가 근처에 있는 기와집으로 옮겨진다. 오늘은 이 집 제삿날이다. 무명 배우인 장손(長孫) 성진도 서울에서 내려와 3대가 모였다.
“아이고, 우리 성진이 왔나∼. 어매야 35도네! 어서 에어컨 틀어라!”
할머니의 호들갑과 함께 장식인 줄 알았던 에어컨이 작동한다. 임신한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전을 부치는 누나 미화, 자정 전에 제사 올리는 건 죽어도 안된다는 할아버지 승필,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며 찢어진 전을 안주로 내달라는 아버지 태근, 돈 잘 버는 남편과 곧 베트남으로 이민 간다는 작은고모 옥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큰고모 혜숙 등. 10명이 넘는 등장인물 모두 어딘가 낯설지 않다.

“저 두부 공장 안할 거예요. 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죠.”
그날 저녁, 밥상 위에 던져진 성진의 폭탄선언은 집안 싸움의 불씨가 된다. 예상대로 할아버지의 호통과 아버지의 분노가 이어지고 가족들은 그동안 눌러뒀던 응어리를 하나둘 터뜨린다. 6·25의 트라우마를 품고 살아온 할아버지, 민주화운동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버지, 불만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집안일을 도맡아온 큰고모, 그리고 두부 공장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누나까지. ‘가족’이란 이름 아래 묶인 이들이 사실은 제각각 다른 입장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다. 집안의 정신적 기둥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족의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입관식 장면은 슬픔을 자아내지만 곧이어 돈봉투를 늘어놓고 조의금을 정산하는 현실적인 모습은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웃음이 난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족의 감정은 고추처럼 맵고도 두부처럼 순하다.
족의 생계를 이어온 역사이자 구성원 모두가 지닌 공통의 기억. 영화 속 두부처럼 대를 이어온 두부 맛엔 오랜 세월만큼 단단한 고집이 있다.
경북 김천 ‘삼대두부공방’은 1940년에 개업해 85년째 운영 중인 두부집이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거쳐 지금은 5남매 중 넷째 딸인 김은경씨가 맥을 잇는다. 그는 이르면 새벽 3시부터 콩을 삶고 아침 7시면 손님을 맞는다.
“전생에 대역죄를 지은 사람이 두부집을 이어받는다는 옛날 말이 있어요. 물질하는 일은 그만큼 고되죠.”
열아홉살에 시집와 매일 새벽 두부를 만들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그는 처음엔 두부 공장을 이어받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 때부터 전해 내려온 고유한 두부맛과 그 맛을 기억하고 수십년간 단골로 찾아오는 손님을 떠올리며 결국 가업 가치를 지켜가기로 했다.



김씨는 전통 두부맛을 지키기 위해 옛 방식을 고수한다. 대형 무쇠 가마솥에 콩물을 끓이고, 간수를 풀고 나선 내려온 방법대로 콩물을 젓는다. 순두부를 성형하는 나무틀은 두부의 결착력을 높여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을 만들어낸다. 지역농민에게 품질 좋은 국산 콩을 받아오는 것, 콩을 불리는 시간, 걸러진 콩물을 젓는 속도와 방향 등 전해오는 방식 하나하나가 두부의 식감과 맛을 결정짓는다.


가장 맛있는 두부는 갓 만들어진 두부다. 하얗고 네모반듯한 두부가 폴폴 김을 내며 나왔다. 두부의 온기에 아침의 냉기도 가신다. 건들면 부서질까 싶어 두부를 조심스레 자른다.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탱탱하게 유지된다. 양념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묵직한 식감과 구수한 향이 입안에 가득 번진다. 꼭꼭 씹을수록 그 구수함은 깊어진다. 콩을 삶고 갈고 눌러낸 그 모든 과정이 혀끝에서 느껴진다.
오정민 감독은 “두부가 마치 가족과 같다”고 말한다. 정성 들여 어렵게 만들지만 잘 부서지고, 부드럽지만 또한 쉽게 무너지지도 않기에.
김천=김보경 기자 bright@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