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이맘때, 핼러윈의 기원에 관해 쓴 적이 있다. 어느덧 1년, 세 살 반이 된 내 딸은 이제 핼러윈을 반기며 핼러윈의 공포를 자청한다. 공포가 두려움에서 놀이로 바뀌는 이 전환을 보며 늘 품던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우리는 왜 무서움을 즐기는가.
신경과학의 설명은 간단하다. 공포는 아드레날린을 끌어올려 심박을 높이지만, 안전 신호가 붙는 순간 그 각성은 곧 쾌감으로 뒤집힌다. 그 전환의 한가운데 도파민 보상 회로가 있다는 사실은 지난 10여 년의 연구가 분명히 했다. 위협이 통제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순간 도파민이 활성화되어 ‘무섭지만 즐거운’ 감각을 강화하고, 그 경험은 다음 상황에서 더 침착한 반응을 돕는 학습 효과로 이어진다.

고대인들은 이 원리를 fMRI(두뇌활동검사) 없이도 깨닫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불렀다. 그는 『시학』에서 비극을, 관객이 “연민”과 “두려움”을 느껴 카타르시스를 겪도록 만드는 예술로 정의했다. 카타르시스는 슬픈 영화를 보고 실컷 울고 나서 후련해지는 단순한 배출이 아니다. 감정이 사건의 인과와 자리를 찾아 정리되고, 전환과 인지가 맞물리며 의미가 붙는 과정까지를 포함한다. 인간은 모방을 통해 배우는 존재며, 그 배움에서 쾌락을 느낀다고 그는 보았다.
로마의 문인 플리니우스가 전한 아테네의 ‘귀신 들린 집’(서한집 7권 27번째 편지), 청동을 울려 망령을 내쫓은 레무리아 축제, 지하의 문이 열린다고 믿은 문두스 파테트 명절은 모두 공포를 의례화하는 오랜 관습들이다. 인류학의 언어로 말하면 핼러윈은 경계의 시간, 질서가 잠시 느슨해지는 문턱이다. 한국 민중은 공포를 공동 소유의 감정으로 만들고, 길들여 해소하는 절차 속에서 결속의 기술을 키우는 것 같다. 이번 APEC 정상회담에서도 미국의 무리한 요구로 인한 공포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고 있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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