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이틀 전 전사한 국군 하사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5-14

“말년 병장 때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 거의 대부분 병사로 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한국 남성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조만간 제대하고 민간인이 될 텐데 남은 기간 괜히 군대에서 무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는 현재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군대의 병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엔 종전이 다가올수록 승기를 잡은 나라 장병들 사기는 쑥쑥 올라갈 것만 같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전쟁이 곧 끝날 것’이란 전망이 유력해지는 순간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전장의 병사들은 더는 싸우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초 영국군이 그랬다. 적국인 나치 독일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됐으나 정작 영국군 장병들은 시큰둥했다. 영국의 전쟁사 연구 권위자인 앤터니 비버는 저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을 코앞에 둔 영국군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종전이 눈에 보이는 시점에서 죽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용해 사기가 낮은 편이었다. 탈영 문제는 점점 더 커져서 약 2만명의 병사가 부대를 이탈했다. 병사들에게 공격하라고 설득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으며….” 이런 상황에서 지휘관이 ‘결사항전’을 외치며 장병들을 독려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리얼리즘 전쟁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에리히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저자의 경험이 절절히 녹아들어 있다. 책에 따르면 1차대전 때 아들을 군대에 보낸 독일 어머니들은 물론 자식이 살아 돌아오는 게 최선이지만, 행여 전사한다면 부디 ‘즉사’(卽死)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고통이 없길 기원한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독일군 병사 파울 보이머가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적탄에 맞아 전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독일의 항복으로 1차대전이 휴전에 돌입한 것이 1918년 11월11일이니 꼭 1개월 전의 일이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이 14일 지난해 11월 강원 철원에서 발굴한 6·25 전쟁 전사자 유해의 신원이 육군 7사단 소속 고(故) 함상섭 하사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1925년생인 함 하사는 1953년 7월25일 전투 도중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 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이틀 전의 일이다. 28세 젊은이와 그 가족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에 그저 가슴이 미어질 뿐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주인공 보이머의 죽음을 묘사한 문장은 이렇다. “죽어가면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무척이나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함 하사의 최후도 부디 그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