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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Transformation)이 가속화되고 있다. 오픈AI와 딥시크 같은 혁신기업의 등장은 산업과 사회 전반의 질서를 뒤바꾸고 있으며, 국가 기술 전략 또한 근본적인 재편을 요구받고 있다. 나아가 이런 패러다임 전환을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주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과학기술혁신 정책은 여러 부처에 분산되어 있다. 연구개발(R&D) 예산은 기획재정부와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조정하고, 산업통상자원부는 반도체·배터리 등 주력 산업을 담당하며, 중소벤처기업부는 스타트업·벤처 육성과 중소·중견기업 지원을 맡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기초연구 및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하고 있으며, 국가 R&D 전략의 기획과 조정은 과학기술혁신본부가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체계가 나름 장점을 지니고 있겠지만 부처 간 조율이 쉽지 않고, 그 과정에서 속도와 방향성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AI, 반도체, 양자컴퓨팅 등 핵심 기술 경쟁에서 국가 차원의 거대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이 2022년 8월 발효한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은 반도체 산업 지원, 과학기술 연구 및 혁신 투자, STEM 인재 양성을 기반으로 미국의 기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으로 평가받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미국의 기술 패권과 글로벌 기술 경쟁을 추구하고자 한 의도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과학기술정책 거버넌스 개편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과학기술부총리제를 운영한 경험이 있고,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신설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과학기술혁신본부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내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글로벌 환경과 경쟁 패러다임에 처해 있다.
그동안 수없이 컨트롤타워의 중요성이 논의되었지만, 해법을 찾아내지 못했고, 정책 조정력과 추진력은 여전히 미흡한 상태로 남아있다. 특히, AI, 반도체, 양자컴퓨팅 등 핵심 전략기술 분야에서 부처간 조율을 넘어 통합적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정책은 파편화될 수밖에 없고, 신속하고 결단력 있는 대응이라는 건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이어달리기를 잘하면 된다는 생각에 지금 우리는 발목을 묶은 채 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이런 구조적 한계를 넘어, 전력 질주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국가 차원의 장기적 혁신 전략 수립, 신기술·신산업 육성과 규제 혁신 역시 그 속도와 파급력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또 무엇보다 우리가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반도체, AI, 우주, 양자컴퓨팅 등에서는 파편적인 투자가 아닌 대규모·장기적 투자가 필수적이다. 나아가 국가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한 '메가 프로젝트' 기획과 추진도 검토되어야 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논의가 진부하다고,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이야기라고, 이미 우리가 시도해본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기술 패권 패러다임의 한복판에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만 한다. 부총리제와 같은 과학기술혁신정책 사령탑에 대해 다시 논의할 때가 온 것은 아닌가?
지금의 체계로 우리가 미래에도 성장하고 생존할 수 있을까? 만약 이 질문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박재민 건국대 교수·ET대학포럼 좌장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