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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제프 베이조스. 지난달 20일 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앞줄에 서 있던 빅테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다. 이들은 트럼프의 규제 완화와 통상정책을 적극 지지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멕시코·캐나다·중국을 시작으로 관세 전쟁의 포문을 연 가운데 트럼프는 지난 10일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 부과 발표로 한국과 캐나다·유럽연합(EU) 등을 겨냥했다.
세계 최대 단일 시장 거느린 EU
교역국에 규제 준수와 제정 요구
미국 공세에 보복 관세도 만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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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U와 미국과의 통상 분쟁에서는 비단 관세뿐만이 아니라 규제 갈등이 더 크다. 특히 EU가 볼 때 규제는 양보할 수 없는 유럽의 대표 정책이고 미국의 관세 부과에 효과적인 대응책이기도 하다.
메타ㆍ엑스 EU 규제 피하기 힘들 듯
EU는 2022년부터 디지털서비스법(DSA)을 실행해왔다. DSA는 엑스(X)나 메타 등 온라인 플랫폼에 유해한 콘텐트 삭제와 거짓 정보 확산에 적극 대응하도록 규정했다. EU 차원의 경쟁 정책을 담당하는 집행위원회는 2023년 12월 중순부터 메타에 대한 정식 조사를 개시해 위반 혐의가 크다고 결론 내리고 추가 조사를 진행 중이다. 4억4900여만 명의 EU 27개 회원국 시민 중 3분의 1이 이 플랫폼을 사용 중이다.
2억200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거느린 머스크는 미국 대선 운동 기간 때 “민주당이 불법 투표를 위해 이민자를 미국으로 데리고 오고 있다”는 식의 허위 사실을 수시로 온라인에 게재했다. 영국 노동당이 지난해 9월 성범죄자도 조기 석방해 범죄를 조장한다는 허위사실도 유포했다. 머스크는 또 오는 23일 치러지는 독일의 조기 총선에도 극우 독일대안당(AfD)만이 독일을 구원할 수 있다며 적극 개입 중이다. EU의 최종 조사에서 X가 DSA를 위반했다고 결론이 나면 글로벌 매출액의 최대 6%까지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저커버그의 메타는 광고 시장에서 경쟁자의 경쟁을 저해한다는 혐의로 지난해 11월 집행위원회로부터 8억 유로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저커버그는 지난달 EU의 빅테크 규제가 관세와 같다며 트럼프 행정부에 저지를 요청했다. 메타가 팩트체크 팀을 해체한 것도 이때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때부터 거짓 정보 확산을 막는 소셜 미디어를 강력하게 비판해왔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이 때를 기다린 것처럼 트럼프의 정책에 동조하며 EU를 함께 압박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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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나 미국 빅테크는 EU의 소셜 미디어 규제를 ‘제도화한 검열’로 규정하며 표현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반면에 유럽은 온라인 플랫폼의 막대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거짓 정보 확산 등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인식하며 민주주의 보호라는 공익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본다. 학자들은 EU의 이런 규제를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로 부른다.
세계 최대의 단일 시장을 거느린 EU는 탄소 국경세, 빅테크와 인공지능(AI) 규제 등을 제정했다. 유럽 시장에 진출하려는 기업은 이 규정을 지켜야만 한다. 유럽은 규제 제정뿐만 아니라 유사한 규제를 교역 상대국에 제정할 것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등에서 요구해왔다. 미국과 EU의 이런 규제 갈등은 규범 전쟁이다. 아날로그 경제의 원유에 해당하는 데이터를 활용해 디지털 경제에서 막대한 이익과 영향력을 누리는 빅테크 규제를 둘러싼 뿌리 깊은 논란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중순 스위스 다보스 포럼 화상 연설에서 EU의 무역과 규제가 불공정하다고 강조했고 캐나다와 멕시코 등에 관세 전쟁을 선포할 때에도 유럽을 콕 집어 재차 위협했다. 중국과 함께 EU의 대미 무역 흑자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EU는 미국과의 상품교역에서 2356억 달러가 넘는 흑자를 기록했다. 2022년부터 3년간 EU는 미국과의 상품 거래에서 각각 2000억 달러가 넘는 흑자를 유지해왔다. 중국에 이어 두 번째의 대미 상품교역 흑자 규모다.
EU의 통상정책은 EU 집행위원회가 행사한다. 집행위원회는 1년 전부터 ‘트럼프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어 ‘트럼프 2.0’에 대비해왔다. 미국산 LNG를 비롯해 자동차 등의 수입을 대폭 늘릴 계획이다. EU는 협상을 선호하지만 타결이 되지 않을 경우 미국산 수입품에 대규모 보복 관세를 고려 중이다. 이 과정에서 EU는 대미 협상력이 있는 미국 빅테크에 대한 규제를 관세와 연계해 협상 카드로 사용할 듯하다.
EU의 대미 교역 흑자, 중국 이은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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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지난 10일 외국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25% 관세 부과를 발표했다. EU는 협상에 응하겠다며 결렬 시 “굳건하고 상응하는 대응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가치 공동체 서구를 형성해 온 미국과 유럽의 통상 분쟁이 시작된 가운데 트럼프의 자국 우선의 무역정책이 결국 미국에 독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의 국제칼럼니스트 기드언 라크만은 지난 4일 칼럼에서 중국을 봉쇄하려는 트럼프 행정부가 EU와 협력하지 않고 갈등을 지속할 경우 EU도 중국과 협력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내다봤다.
미국의 저명한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도 2012년 글에서 미 지도자들에게 “서구를 업그레이드하고 글로벌 이스트에 대한 균형 잡기” 전략을 주문했다. 한국과 터키 등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여러 나라를 서구에 편입시켜 서구의 파워를 늘려야 중국과 러시아 같은 글로벌 이스트 국가에 대해 균형 잡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전략은 정반대다.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지정학의 바다에서 국가라는 수십 척의 배가 전례 없이 요동치고 있다.
안병억 대구대·국방군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