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와이너리] 탄핵의 'ㅌ'이 북한 서체라고? 팩트체크

2025-01-06

[비즈한국]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 크게 놀라거나 혼이 나면 비슷한 것만 봐도 거부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오랜 내전을 겪은 대한민국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트라우마의 대상이다. 그런데 최근 폰트에서 때아닌 친북 논쟁이 벌어졌다. 한글 자소 ‘ㅌ’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

지난해 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탄핵 정국이 열리면서 탄핵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현 보수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 피켓에 사용된 제목용 고딕 폰트 중 일부가 북한에서 주로 쓰이는 폰트라는 주장이 보수 진영 일부에서 제기됐다. 그 근거로는 자음 ‘ㅌ’의 모양이 제시되었다.

‘ㅌ’은 ‘ㄷ’에 가로획을 더해 만든다. 이를 구현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① ‘ㄷ’ 내부에 가로획을 추가하거나, ② ‘ㄷ’ 위에 가로획을 따로 그리는 방식이다. 문제는 ②의 방식으로 만든 ‘ㅌ’이 북한에서 주로 쓰이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②의 ‘ㅌ’이 적용된 폰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북한과 연계되어 대한민국 안보를 위협하는 자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이는 음모론의 과몰입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글 디자인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 같은 자소라도 꼭지를 눕히느냐 세우느냐(ㅊ/ㅎ), 쌍자음을 만들 때 두 자음을 이어 붙이느냐 아니면 가운데에 획을 그어 나누느냐(ㅃ) 등 여러 요소가 있다. ①의 ‘ㅌ’과 ②의 ‘ㅌ’ 역시 이러한 디자인 옵션 중 하나다. 한글 디자이너는 폰트를 제작할 때 콘셉트와 제작 환경에 따라 어느 형태를 택할지 결정한다. 분단 이전에도 ①과 ②의 ‘ㅌ’은 모두 존재했다. 다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은 표준이 있음에도 양쪽 선택을 강제하지 않는다. 반면, 북한은 경직된 사회 구조로 인해 특정 형태만 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폰트 산업의 낙후로 다양한 폰트를 제작할 여력이 없는 점도 북한의 디자인 제한에 한몫했을 것이다.

따라서 ‘ㅌ’ 모양은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당 홍보물만 봐도 알 수 있다. 전단지와 현수막에서 보수·진보 정당 모두 ‘ㄷ’ 위에 가로획을 따로 그은 ‘ㅌ’을 사용한 경우가 있다. 만약 ‘ㅌ’ 모양으로 정파를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여야가 모두 친북 세력이니 대한민국은 이미 오래전에 공산화되었어야 한다. 그렇다면 북한이 자칭하는 국호에 포함된 ‘조선’이나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매체는 모두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인가? 지나가던 간첩이 웃을 일이다.

‘ㄷ’ 위에 가로획을 따로 그은 ‘ㅌ’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폰트로는 Sandoll 격동고딕이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이 폰트는 시위 피켓에서도 사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격동고딕 출시 초기 자료에서 박정희 대통령 후보의 1971년 선거 포스터가 콘셉트 설명의 예시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의미 없는 일이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격동고딕은 북한과 연관된 폰트가 아니라 오히려 대한민국이 이룩한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상징하는 폰트에 더 가깝다. ‘ㅌ’ 모양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자신이 극우 음모론에 빠져 보수 진영의 성과마저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음모론은 지속적인 불신을 낳는다. 음모론에 한 번 빠지면 아무리 합리적인 반박을 들어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과 확증편향, 망상이 가속화될 뿐이다. 지금은 의혹에서 벗어나 냉철한 시각을 가져야 할 때다. 시간 낭비에 가까운 문제 제기 대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강화를 위한 생산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북한과의 대치에서 이기는 방법은 폰트의 획 몇 개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계엄 선포라는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려 한 이들을 처벌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뿌리를 튼튼히 내리는 것이다.​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 ​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bong@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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