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영원하다"…전시 방명록으로 남은 1950년대 수집가 '털보 윤상'

2025-03-16

최근 3,4년간에 걸쳐 모인 현대화가 작품 60여 점은 나의 큰 자랑이며 수집가라는 이름이 생기고 말았다…제2회전 때는 더 성대한 전람회를 열 작정이다. (윤상, 수집가의 사명, 1956년 7월)

37세의 수집가 윤상(1919~60)은 1956년 7월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을 연다. 고희동ㆍ이상범ㆍ도상봉ㆍ천경자ㆍ김환기ㆍ장욱진 등 당대 화가 49명의 64점을 걸었다. 전시 후 현대미술관의 필요성이 제기될 만큼 반향이 일었다. 9일 동안의 전시를 마치고 윤상은 신문에 칼럼을 기고해 “두 번째 전시는 더욱 성대하게 열겠다”고 다짐했지만, 41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됐다.

평양 출신으로 과수원을 운영했다는 정도만 알려진 수집가 윤상. 이제는 이름마저 생소한 그가 생전에 연 단 한 번의 전시는 ‘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 기념서화첩’이라는 두툼한 방명록으로 남았다. 서울 우정국로 OCI 미술관에서 22일까지 이어지는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은 이 방명록을 실마리로 꾸린 전시다. 미술관은 2010년 케이옥션 경매에서 ‘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 기념서화첩’을 사들인 지 15년 만에 공개했다. 이 서화첩은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공사립미술관 보존지원 사업’에 선정돼 7개월여에 걸쳐 클리닝, 표지 배접, 재장정 등의 보존처리를 받았다.

서화첩에 축하 기록을 남긴 사진가 임응식은 윤상 전시에 출품한 작가 중 38명의 초상 사진을 찍었다. 이번 OCI 전시에는 이들 사진과 함께 방명록에 기록을 남긴 이들까지 57점의 인물 사진이 함께 걸렸다. 윤상 전시에 나왔던 유영국의 ‘도시’(1955)를 비롯해 이상범ㆍ이응노ㆍ김환기ㆍ김기창 등 전시 출품 작가 49명 중 16명의 작품도 나왔다.

출품 화가 천경자는 도라지꽃을 그리고 “작품이 많이 나가지 않아 퍽 섭섭합니다”라고 적었다. 서양화가 박득순, 동양화가 운보 김기창은 윤상의 얼굴을 그려줬다. 서화첩에는 출품 화가들 뿐 아니라 당대의 배우ㆍ문인ㆍ서예가ㆍ음악가ㆍ영화감독 등 104명이 다채로운 그림과 메모를 남겼다. 윤상은 방명록의 페이지마다 자신의 도장을 찍고 전시와 관련된 신문 기사도 오려 붙였다.

당시 전시된 윤상 소장품은 그의 요절로 흩어졌다. 전시작 중 현재 행방이 확인된 작품은 2점이다. 한 점은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장욱진 회고전에 출품된 ‘가족’(1954), 윤상의 전시 당시에는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걸렸다. 미술관 유제욱 학예사는 "현대 미술작품이 창작되고 주인과 제목이 바뀌며 소비된 이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화첩이) 한국 현대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말했다.

나머지 한 점은 유영국의 ‘도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상 전시 리플릿에 기록이 남아 있다. ‘산’의 화가 유영국이 남긴 드물게 도회적인 반추상화다. 윤상의 전시 이후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리플릿에는 출품작 목록 외에 당시 대한미술협회 위원장이던 도상봉의 전시 서문도 남아 있다. “화단의 원로 선배를 위시해 중견ㆍ신진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된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행사로 중대한 의의를 가져온다”고 썼다.

도상봉의 글처럼 화합의 전시였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시가 열린 1956년은 현대 미술계의 주도권을 놓고 홍대파(대한미술협회)와 서울대파(한국미술가협회)의 이른바 ‘국전 분규’가 일어난 때다. 그러나 윤상의 개인적 취향으로 수집한 작품전에서는 대한미협 위원장 도상봉이 서문을 썼고, 동문인 원로 화가 고희동의 그림이 첫 번째로 전시됐다. 1955년 발족한 한국미협 회원인 박득순ㆍ장욱진ㆍ문학진ㆍ이세득ㆍ김병기 등 서양화가들의 그림도 함께 걸렸다. 백자에 꽂은 라일락을 유화로 즐겨 그리던 도상봉은 서화첩에 수묵으로 매화를 그려 넣었다. 계파와 세대를 초월해 전통과 현대를 이어가는 당시 한국 현대화단의 운치가 서화첩으로 남았다.

지난 1월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 전시 개막 이후 미술관에는 윤상에 대한 제보가 이어졌다.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신수경 회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이중섭의 1955년 미도파백화점 전시 방명록에 윤상의 도장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이중섭 전은 평양 출신 문화인들의 후원으로 열렸다. 생전의 윤상을 기억하는 이도 나타났다. 올 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연 원로 화가 박광진(90)은 “전시 당시는 내가 홍대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스승 손응성과 윤상의 술자리에 동석한 기억이 있다”고 알려왔다. 미술관은 이러한 자료를 모아 세미나를 열 계획이다.

이름도 잊힌 윤상이 한 권의 방명록으로 되살아났다. 이 방명록에 당시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은 독일어로 한 문장을 남겼다.

예술은 영원하다(Ewig Bleibt Die Ku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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