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의 땅에 남은 소떼…그들의 낙원 같은 지옥

2025-07-03

‘원전 참사’ 후쿠시마에서 수십만명 떠나며 동식물은 버려져

정주하 작가 찍은 사진에 황모과·백민석 작가가 소설로 엮어

“인간이 이곳 목장과 목장 인근에서 모습을 감춘 뒤 목장은 소들에게 죽음이 없는 곳, ‘낙원’이 되었다. 인간은 이제 아무도 우리를 도살하러 오지 않는다. 송아지는 장수하고 소들은 영생한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며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다. 방사능 노출을 피하기 위해 수십만명이 살던 땅을 떠났다. 떠나지 못한 것들도 있다. 땅에 뿌리박고 살던 나무와 풀, 그 대지 위에서 살던 동물들이다. 일부는 죽었다. 급하게 떠난 인간이 풀어주지 않은 목줄에 매여 아사한 것들이다. 이동의 자유가 있는 동물들은 살 방법을 찾았다. 그 목장의 소들은 800년을 더 살아낸다.

<파라-다이스> 속 황모과의 단편 ‘마지막 숨’의 이야기다. 사실은 낙원이 아니다. 점점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소들은 인간이 던져준 배합 사료에 의지하며 살았다. 이것이 문제였다. 방사능 물질이 흘러들어간 바다에서 죽은 인어의 사체로 만든 사료는 소들을 불로불사의 존재로 만들었다. 가장 연장자였던 소 ‘마고 장로’는 인간에 의해 촉발된 기만적인 생을 끝내려 단식에 들어간다. 소들은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생을 얻었을까. 어떤 일을 해야 소의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까.”

파라-다이스

정주하·백민석·황모과 지음 | 서경식 기획

연립서가 | 216쪽 | 2만5000원

한 비구니가 인어 고기를 먹고 800년을 살다 동굴에 들어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일본의 전설에서 따온 소설은 그저 허무맹랑하다고 말할 수 없다. 소설 속 소들이 바로 지금 후쿠시마에 산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모과는 그 소들을 사진작가 정주하가 찍어온 사진 연작 ‘파라-다이스’를 통해 마주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일어난 2020~2022년, 3년을 제외하고 정주하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매해 후쿠시마를 찾았다. 2015년부터는 소들이 자연사할 때까지 그들을 돌보는 목부가 있는 미나미소마의 ‘희망농장’을 찾았다. 모두가 떠난 곳에서 목부는 홀로 소들을 돌본다. 정주하는 그 모습을 흑백 사진에 담는다. 인간이 떠난 땅에 남은 소들 뒤로, 지금도 도시에서 쓰일 전기가 흐르고 있는 송전탑이 보인다.

소들은 이제 그들의 살과 가죽을 원하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 생이 행복하다고 말할 순 없다. 책에는 2023년 미나미소마를 찾았던 정주하의 일기가 실렸다. 그는 방사능을 머금은 풀이 베어져 소들의 사료로 쓰이는 모습을 본다.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렵다 보니 목부는 누군가 기부라며 준 상한 호박을 소들에게 먹이기도 한다.

정주하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목부는 혼자, 그나마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난해서 소들에게 그것밖에 줄 수 없는 것을 비난해야 할까. ‘이것이 누구의 책임이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소들은 (원전 사고가 보여준) 인간 욕망의 증언자로서 생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일기에는 방사능 노출로 한 해가 다르게 죽어가는 식물들, 그 땅에서 나온 방사능 오염토를 지역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재사용하겠다는 일본 정부 등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후쿠시마의 모습이 담겼다. 이런 일상의 모습은 컬러 사진으로 책에 들어갔다. 이들 사진은 검게 찍힌 소들과 대비되며 이질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소들을 찍은 사진에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부’ 혹은 ‘~을 넘어’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접두사 ‘파라(para-)’에 죽음을 뜻하는 ‘dies’를 더했다. 소들의 낙원으로 읽히기도 하고, 죽음을 넘어서거나 거부한 그들의 운명에 붙인 이름 같기도 하다.

본래 이들 사진으로 사진전을 기획했으나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 교수가 생전 이 작품들을 보고 책으로 낼 것을 기획했다. 황모과와 백민석 작가에게 정주하의 사진과 일기 등을 본 뒤 그에 걸맞은 작품을 요청했다. 백민석은 2023년 제2원전까지 녹아내린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검은 소’라는 단편을 책에 실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재일조선인 게이코는 남편의 폭력과 사회의 무관심으로부터 도망쳐 방사능으로 폐허가 된 땅에 정착한다. 소들처럼 게이코도 버려진 존재다.

‘파라-다이스’ 사진 연작은 오는 9월 일본 도치기현에서 전시로도 소개된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