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년 하고도 몇달이 흘렀는데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윤석열 정부가 맹렬하게 의대 정원 증원을 추진하고 있었고, 핵심은 그 규모였다. 수백명 수준으로 시작한 추정치는 하루가 다르게 부풀었고, 급기야 발표 당일 오전 한 신문에 ‘2000명 증원’이라는 단독보도가 나왔다. 그 기사를 보고 당시 담당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설마 2000명은 아니겠지. 이건 너무 무성의한 숫자잖아. 의사 증원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마치 무 자르듯 2000명으로 결정한다고? 어떤 고민의 흔적도 보이지 않게?” 하지만 나의 순진한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난해 2월6일, 정부는 2025학년도 의과대학 정원을 정확히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의사 수를 늘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붕괴를 막겠다는 명분이었다. 나 역시 그 목표와 방향에는 동의했다. 문제는 2000명이라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수치, 그리고 이를 밀어붙이는 방식이었다. 정부는 몇몇 연구보고서를 근거로 제시했지만, 정작 해당 연구자들조차 그 숫자에 직접 동의하지 않았거나 증원 규모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점진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2000명은 과학적 추계보다는 정치적 고려 혹은 누군가의 고집 때문이었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해졌다.
정부는 일방적으로 규모를 통보했고, 이에 반발하는 의료계에는 강경 일변도로 대응했다. ‘강 대 강’의 평행선은 의료 현장의 마비로 이어졌다. 고통과 불안은 오롯이 국민의 몫이었다. 결국 정부는 ‘2025학년도에 한해 대학 자율 조정’을 내세워 사실상 후퇴했고, 증원 규모는 약 1500명선으로 축소됐다. 정부가 2000명이라는 숫자에 과학적 근거나 타당성이 부족했음을 자인한 꼴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의료계의 신뢰는 산산이 조각났다. 의료 시스템은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고,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의 위기는 오히려 가속화되는 양상마저 보였다. 절차적 정당성과 현실을 도외시한 채,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2000이라는 숫자에 대한 집착이 어떤 파국을 초래하는지 한국 사회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웠다.
지난 8일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대법관 100명으로 증원’을 핵심으로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재 대법원장을 포함해 14명인 대법관을 7배가 넘는 100명으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장 의원은 법안 제안 이유로 연간 수만건에 달하는 대법원 접수 사건과 대법관 1인당 수천건의 업무 부담을 언급하며 “개별 사건에 대한 충분한 심리와 판단이 사실상 불가능해 상고심 제도에 대한 국민 신뢰가 심각하게 저하된 실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법관 정원을 100명으로 증원해 대법원이 사건을 보다 심도 있게 심리할 여건을 마련하고 다양한 배경의 인재들이 대법관으로 진입할 구조를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의 의도를 굳이 나쁘게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왜 하필 지금이냐’는 식의 정치공학적 질문도 본질적인 논의를 가로막을 수 있다. 다만 ‘100명’이라는 숫자를 듣는 순간, 지난해 정부가 그토록 고집했던 ‘의대 정원 2000명’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왜 ‘100명’이어야 하는가. 내가 과문한 탓인지, 그 필연성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찾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 100명이라는 수치 뒤에 얼마나 정교하고 체계적인 분석이 뒷받침되었는지 깊은 의문이 든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모든 현안과 필요조건을 자세히 검토한 결과, 한국 대법원에 가장 적합한 대법관 수가 공교롭게도 딱 100명이었던 것일까.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 없이 제시된 100명이라는 수치는 공허한 구호로 전락할 수 있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시도가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숫자에 대한 집착으로 망가졌듯, 대법관 100명 증원 안 역시 법조계와의 충분한 숙의나 사법 시스템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없이 밀어붙이다가는 역풍에 부딪힐 수 있다. 정책의 선의와 별개로 그 과정에서 합리성과 현실성이 부족해 보이면 실패는 불가피하다.
명쾌해 보이지만 근거가 부족한 숫자, 소통 없는 일방적 추진은 사회적 갈등만 증폭시키고 정책 목표 달성을 요원하게 만들 뿐이다. 즉흥적인 정책이 아니라 냉철한 분석과 진정성 있는 소통, 여기에 발생 가능한 모든 파급효과에 대한 면밀한 검토에 기반한 합리적 개혁이 필요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