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달 전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선이 성큼 다가왔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중요한 질문의 답을 찾아야 한다. “좋은 정부란 무엇이며, 이를 위해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가.”
영화 콘클라베에서 로렌스 추기경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죄로 확신을 꼽는다. 확신이야말로 통합과 관용의 적이라고 하면서 그는 “의심할 수 있는 교황”을 위한 기도를 제안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교황의 자리에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의사결정권자를 대입해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확신하는 대통령보다 의심하는 대통령이 낫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비도덕적 선택을 내리는 순간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평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윤리적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심적 기술을 동원하는데, 이를 ‘중화의 기술’이라고 부른다. 중화의 기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람은 비도덕적 행위를 하면서도 나 자신이야말로 피해자라거나, 사실 어떠한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다거나,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세상이 자신에게 부당한 책임을 전가되고 있다거나, 헌법과 같이 보다 높은 가치에 의해 자신의 행동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익숙한 말들이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언론을 통해 여러 정치인에게서부터 자주 듣는다.
중화의 기술은 비도덕적 의사결정이 유일무이한 선택지였다고 합리화하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선택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돕는다. 양심의 저항이 차단되고 자신의 비도덕적 선택을 도덕적 결정으로 확신하게 되어버렸을 때 도덕성을 회복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자기 확신 속에서 자신은 원대한 가치의 수호자가 되고, 피해자는 얼마든지 원망하고 탓할 수 있는 악마가 된다.
대통령 한 사람을 선출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정보망을 함께 선출하는 일이다. 최종 책임자는 대통령 개인이더라도, 대통령의 의사결정은 집단의 정보에 근거한다. 비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집단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비도덕적 결정을 합리화한다. 집단의 도덕성을 맹목적으로 믿고, 적대 집단을 악마화하고, 자신들이 만장일치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어빙 제니스는 이를 ‘집단사고(groupthink) 증상’이라 불렀다.
응집력이 높고 갈등이 드문 집단에서 집단사고 증상이 발생할 위험이 높다.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지기 어렵거나 지도자가 일방적 리더십을 보인다면, 집단사고에 빠져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독선적 지도자는 내집단 사람들로 주변을 채워 반대 의견은 멀리한 채 집단사고 증상에 빠지기 마련이다. 요컨대 의심하지 않는 지도자가 집단사고를 자초한다.
그러니 로렌스의 기도는 탁월했던 셈이다. 의심하는 지도자야말로 귀하다.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 마치 답을 아는 듯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위험하다. 국민을 섬기는 자가 겪을 가장 고된 일은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회의하고 의심하는 일이어야 한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지도자와 그의 의심을 도울 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의심하는 정부와 길들여 지지 않은 이견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