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걸 이사장 유품 정리 중 발견
고어·일본식 한자 많아 1년 작업
박정희 비상계엄 선포일 등
긴박했던 국내외 정세 생생히
아내와 세 아들 남겨두고 떠난
기약 없는 망명 투쟁의 길
가장의 불안·고통 고스란히 담겨
난중일기와 비견될 시대 기록물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1972년 10월1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본에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와 일본 정치인들과의 만남을 위해 그해 일본을 자주 방문했다. 계엄 선포 당일에도 당시 일본 참의원 의장인 고노 겐조를 만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아내인 이희호 여사에게 귀국이 어려워졌음을 전하고, 다음날부터 긴 망명길에 오른다.
김 전 대통령은 계엄 이전인 그해 8월26일 일기에 ‘1975년에는 선거가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1971년 대선 유세 내내 “정권교체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음 선거는 치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그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 그것은 오늘로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가 형해(形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나는 결국은 박정희씨가 말하는 남북통일 촉진 운운은 거짓 명분이고 그의 독재적 영구집권을 위한 것이 분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1972년 10월17일)
계엄 이후 국회는 해산됐고, 헌법은 정지됐다. 김 전 대통령은 “청천벽력의 폭거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주적 처사”라고 비판했다. 그는 귀국할지 망명할지를 택해야 했다. 국내로 돌아가면 유신 정부에 검거돼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을 게 자명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을 돌며 반유신 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최근 출간된 <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는 1972년 8월3일부터 1973년 5월11일까지 김 전 대통령이 자필로 쓴 일기 223편을 수록한 책이다. 지난해 여름, 유품 정리를 하던 김홍걸 김대중·이희호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에서 김 전 대통령이 쓴 6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단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는 기록물이었다. 수기로 적힌 일기는 고어(古語)가 많고 일본식 한자 표현도 다수 사용돼 이를 제대로 판독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가 1년가량 힘을 모았다.
김홍걸 이사장은 22일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망명일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유품을 정리하다 쇼핑백 속에 담긴 서류와 일기를 발견했다”며 “당시 일기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자칫 쓰레기통으로 향할 뻔했지만 운 좋게 발견해 책으로 만들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본래 일기에 적힌 제목은 ‘망향일기’였다. 망향일기가 망명일기가 된 것은 역사적 가치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장은 “개인 김대중으로서 조국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기록일 수 있지만, 공인 김대중으로서는 자기가 몸담은 공동체의 상황, 비상계엄과 연관된 망명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다”며 “오랜 토론 끝에 ‘망향’이 아닌 ‘망명’으로 제목을 정했다”고 말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난중일기>와 비견될 만한, 당시 시대상을 보여줄 기록물”이라고 했다.
책에는 당시 급박했던 국내외 정세가 생생하게 담겼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 미국, 다시 일본에 체류하면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적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에 자기 뜻을 알렸고, 에드윈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 등 여러 지식인과 접촉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전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 정치인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국제적인 반대 여론 형성에 이바지했다.
“케네디 의원은 나에게 ‘뉴요커’지의 한국 관계 기사를 읽었다며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부탁하라, 한국보다 당신 개인에게 더욱 관심이 크다, 한국에 가더라도 연락을 끊지 말고 계속 연락하라고 하는 등 극진한 호의를 보여주었다.” (1972년 12월13일)
박명림 관장은 “(김 전 대통령이)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사실상 대안정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기에는 빚더미 속에 아내와 세 아들을 남겨두고 홀로 망명한 가장의 불안과 고통, 기약 없는 망명 투쟁을 이어가는 정치인으로서의 고뇌, 유신 독재의 압력과 회유에 흔들리는 옛 동지들의 소식, 개인적인 안위만을 생각하면서 독재에 신음하는 국내 현실을 외면하는 인사들에 대한 분노 등도 담겼다.
“인생의 가치는 얼마만큼 높은 자리에 있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바르게 최선을 다해서 살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만고불변의 이치를 잊어버리고 수단 방법을 다해서 돈과 높은 지위만을 위해서 자신조차 잊어버리고 날뛰다 쓰러진다. 하느님과 자기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그리고 국민과 세계 인류를 위해 헌신한 일생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1972년 8월14일)
“나는 억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또 역사의 필연성에 근거해서 박정희 정권의 필멸을 확신하며 나의 승리가 있을 날을 위해 대비해나갈 것이다.” (1973년 1월1일)
“가족과 옥중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괴롭다.” (1973년 1월19일)
“주여, 우리 조국에 민주주의를 베푸소서. 주여, 불행한 동포와 동지들에게 위로를 주소서. 주여, 저의 가족을 보살펴주소서. 주여, 모든 국민이 자기의 권리를 자기의 희생으로 쟁취하는 자각을 주소서.” (1973년 3월1일)
김 이사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독재를 위한 친위 쿠데타를 하고 야당을 제거하기 위해 납치를 자행했던 것처럼, 윤석열 정권도 총선 참패를 국민 탓하고 부정선거라는 음모론을 말하다가 계엄까지 저질렀다”며 “계엄을 획책하는 역사가 반복되는 상황에 ‘망명일기’라는 역사적 기록물이 등장한 게 반갑다”고 말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4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