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정원] 이문열과 톨스토이

2025-04-13

“연출이 근현대사 공부를 하긴 했을까?”

뮤지컬 ‘명성황후’ 30주년 기념 공연을 함께 본 중학교 3학년 아이가 불퉁한 표정으로 한숨을 쉰다. 역사 시간에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주변국 갈등관계’를 발표한 기억에 의하면 “1막의 주변 정세 나열은 역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 잠을 재우기 위한 것”이라는 비평을 한다.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중학교 3학년의 문제제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일견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문열의 희곡 ‘여우사냥’을 각색한 뮤지컬 ‘명성황후’는 사실 1995년 초연부터 역사왜곡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명성황후를 한국의 잔다르크처럼 묘사한 장면들 때문이다. 팩션(faction·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허구) 뮤지컬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보다 더 심각하게 와닿은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될 수밖에 없었던 주변 정세에 대한 뮤지컬 문법이다.

1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명성황후와 고종, 대원군의 서로 다른 선택과 갈등을 중심으로 음악과 안무를 통해 입체적으로 직조하면 좋을 텐데 단순히 나열식에 그친다. 이에 대해서는 원작자인 이문열도 몇번 아쉬움을 드러낸 적이 있다. 2009년 런던 웨스트엔드의 해머스미스 극장에서 공연된 ‘명성황후’를 관람한 이문열은 당시 3000석을 가득 메운 영어권 관객들을 보고 “가슴을 졸였다”며 “20년의 숨가쁜 우리 근대사를 압축하느라 현란한 볼거리의 나열이 돼버린 제1막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2021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질기기가 쇠심줄 같은 친구(연출가 윤호진)가 등을 떠밀어 쓴 작품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애정이 없어 처음엔 곤혹스러웠다”고 밝힌 바 있다.

자식 같은 작품에 대한 이문열의 자기검열을 보니 레프 톨스토이가 떠올랐다. 그는 말년에 비평철학서 ‘예술은 무엇인가’에서 자신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에 대해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부 사람들에겐 즐거움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모든 인간에게 유익하거나 도덕적으로 감동을 준 것은 아니다”라고 냉혹하게 비판했다. 엘리트 계층의 취향에 맞춘 지적 혹은 감정적 과시에 불과했다는 자기검열이다. 그가 통찰한 진정한 예술은 “어떤 감정을 경험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감염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연대(unity)’와 ‘감동(emotional infection)’이야말로 예술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뮤지컬 ‘명성황후’의 2막 엔딩 넘버 ‘백성들이여 일어나라’는 이를 일부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로 시작되는 이 장면은 시해되거나 전사한 등장인물들의 영혼이 무대 뒤에서 한걸음씩 무대 앞으로 걸어나와 죽어서도 구국의 의지를 불태운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비판하던 아이도 며칠째 “동녘 붉은 해∼”를 흥얼거린다. 난해하고 지루한 장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동’은 확실히 전달되는 작품이다.

문화칼럼니스트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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