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정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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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에 준하는 정치위기를 맞았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찬반 시위는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정치 개혁을 위한 절호의 기회다. 고장 난 정치 제도를 수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높아졌다. IMF 경제위기 때 한국은 대량 해고와 기업 부도를 겪으며 혹독한 구조조정을 이겨냈다. 그리하여 경제 체질을 개선하고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도약했다. 이제는 정치 체질을 바꿀 때다. 낡은 틀을 벗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권력을 분산하고 협치를 제도화해 대한민국의 재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IMF 위기에 준하는 정치위기 발생, 정치개혁 위한 ‘절호의 기회’
포용과 자제는 민주주의 전제조건, 중용 잃으면 극단주의로 흘러
올바른 중용은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정치적 태도
낡은 틀 벗고 극단적 소수에 휘둘리지 않는 정치 제도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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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뉴스가 일본 주요 일간지 1면을 연일 장식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활동한 한 학자는 이렇게 해석했다. ‘잃어버린 30년’을 경험한 일본의 노장년층은 빠르게 성장한 한국이 지금 겪는 문제를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일본 사회는 정체돼 서서히 더불어 늙어가지만, 한국은 빠른 변화 속에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한국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변화와 혁신이 가능한 한국의 ‘역동성’이 신선하고 때론 부럽기까지 하다. 일본의 질서와 관행은 안정감을 주지만 답답하다. 한국의 변화무상함과 사회적 에너지가 부러울 때도 있다.
민주주의 회의론 빠질 이유 없어
그런데 역동적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이 직면한 국제 환경은 녹록지 않다. 21세기 들어 지구촌에서는 자유민주주의 보편적 가치보다는 국가안보, 문명 다양성, 전통 가치를 우선시하는 규범이 확산돼 왔다. 글로벌 테러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같은 국가 간 전쟁이 발발하면서 안보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국가안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약해야 한다는 논리가 더욱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시민권과 법치를 약화시킬 수 있다.
또한 문명의 다양성을 강조하며 국제사회가 각국의 국내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중국은 문명 다양성을 주창하며 자유민주주의 보편성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권위주의 국가다. 최근 중국 정부는 자국의 발전 모델이 서구의 발전 모델보다 우월하다는 이념 공세를 펼치면서 글로벌 차원의 체제 경쟁을 심화시키고 있다. 한편 서구의 개인주의가 불러온 도덕적 쇠퇴와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종교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귀환은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마저 더 요동치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에 대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윈스턴 처칠은 말했다.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모든 체제를 제외하곤 최악의 체제이다.” 민주주의가 그래도 지금까지 존재했던 정치 체제 중에서 최선이라는 얘기이다. 다른 비(非)민주주의 체제들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이며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권위주의 정권의 인권침해, 언론탄압과 부정부패는 주지의 사실이다. 민주주의 회의론에 무기력하게 빠질 이유는 전혀 없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성립된 국가
한국인의 심성 저변에는 불교든, 유교든, 기독교든 세계적인 것을 향한 지향과 열정이 존재한다. 한국인은 보편 문명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의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의 속도와 형태를 문제삼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가 과거 세대로부터 축적돼 온 경험과 지혜로부터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변화는 연속성에 기반을 둬야 한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자유·민주·법의 지배라고 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자유 헌정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고 유지해왔다. 보편적 가치와 책임을 품은 한국의 정체성은 3·1 독립선언에서 대한민국 헌법까지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담긴 3·1운동의 정신과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다짐은 이러한 가치의 연장선에 있다.
한국의 정치 발전과 정체성은 글로벌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보고서 ‘글로벌 대한민국의 새로운 한일협력’을 공동 집필한 안도경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국 현대사의 긍정적인 경로는 세계적 차원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성립과 깊이 연관돼 있다.” 독립된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외친 3·1운동은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원칙에 영향을 받아 더욱 힘을 얻었고, 1943년 카이로 선언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 것도 전후 자유주의 국제질서 구축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결정이었다는 뜻이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파병된 것은 단순한 군사 개입이 아니라 자유주의 세계질서에 기반한 집단안보 체제의 첫 현실화였다.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과 민주화 역시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혜택을 받으며 이뤄졌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한국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경제발전·민주화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자신들만의 이익이 아닌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기여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후발 탈식민지 국가들에서도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강인하고 유연한 ‘중용의 정치’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모범 사례로 칭송받았던 한국이 큰 시련을 겪고 있다. 민주주의 전제조건인 포용과 자제의 미덕이 실종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 개혁을 위해서는 ‘중용(中庸)’이 중요하다. 미국 인디애나대 아우렐리안 크라이우투 교수는 중용을 “용기 있는 정신을 위한 미덕(A Virtue for Courageous Minds)”이라고 주장한다. 중용의 정치는 역사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중용의 정치는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우유부단하다, 기회주의적이다’ 등의 비판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라이우투 교수는 중용이 단순한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정치적 사고방식과 체계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적극적인 미덕임을 강조한다. 중용이 없는 정치는 광신과 극단주의로 흐르기 쉽다. 올바른 중용은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정치적 태도이며 헌법적 가치와 자유 사회의 자기 정화 능력을 강화한다. 중용은 입헌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절대적 신념을 내세우는 정치(politics of faith)에 대비되는 회의적 정치(politics of skepticism)의 입장을 취한다. 개인의 신념을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두는 태도인 것이다. 작은 옳음을 넘어 큰 옳음을 찾아가려는 유연함이기도 하다. 단순한 온건주의가 아니라 강인하고도 유연한 정치적 미덕이다.
이러한 중용의 덕목은 격변기 한국의 내치뿐만 아니라 외치를 이끄는 나침반 역할도 할 수 있다. 외국과의 교류에서도 한국은 부분과 이견을 중시하는 ‘원칙적 다원주의’를 내세워야 한다. 원칙적 다원주의는 헌법에 의한 통치라는 대원칙 아래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생각과 이익을 존중하는 관점이다. 법적 테두리 안에서 미국·중국·북한·일본 등에 대한 다양한 시각도 공론장에서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모든 국민은 헌법이 정한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해야한다. 국민이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번영의 기회를 확대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국 사랑하려면 조국이 사랑스러워야
만일 다른 국가가 부당하게 우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면 법에 따라 대처해야 한다. 외국 국가기관이 음성 자금, 경제적 이권, 정보 조작, 강압 등 위법한 수단을 동원해 은밀하게 한국 정치에 개입한다면 엄정한 대응이 필요하다. 외국 행위자의 법과 상식에 어긋난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함을 보여줘야 국격과 기강이 바로 선다. 실천에서는 유연성을 갖지만 일관된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원칙에 입각한 다원주의적 대응이 주변 국가와 공존하며 한국의 ‘자유 헌정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말했다. “조국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조국이 사랑스러워야 한다.” 한국은 IMF 국가 부도 위기 이후 다시 역대급 위기를 맞이했다. 이번엔 정치다. 정치 개혁의 기회가 도래했다. 고통스럽고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극단적인 소수에 휘둘리지 않는 정치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의 저력을 믿어보자. 개항 이후 약 150년간 한국인들이 보여준 고투와 성취의 역사를 이어가자. 이것은 다음 세대에게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물려줄 우리의 책임이다. 조국이 사랑스러워야 한다.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