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와 고려대가 맞붙는 연고전(고연전) 때마다 연대생들이 애창하는 응원곡 가운데 ‘서시’(序詩)가 있다. 2003년부터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죽어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길’이란 가사로 시작한다. 윤동주(1917∼1945) 시인이 쓴 시(詩)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3악장의 곡을 붙여 만든 노래다. 연주 및 합창 시작에 앞서 응원단장이 큰 목소리로 “하늘에 계신 윤동주 선배님께 바칩니다”라고 외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윤 시인이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1941년도 졸업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연대의 라이벌인 고대 학생들 중에도 응원가로서 ‘서시’를 사랑하는 이가 무척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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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윤동주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들 중 한 명이지만 정작 그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됐다. 광복 이후인 1948년에 나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그것이다. 애초 윤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1941년 첫 시집을 펴내려 했으나, 당시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던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는 등 암울한 시대 상황을 감안해 뒤로 미뤘다고 한다. 초판에 수록된 시는 30여편에 불과했지만, 증보판에는 110편 넘는 작품이 담겨 있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영역에 해당하는 용정(龍井)에 살던 윤 시인의 친인척 등 지인들이 고인의 미발표 작품들을 갖고서 한국에 입국한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윤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중 순국했다. 그는 도시샤대 문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1943년 ‘조선 독립을 논의하는 유학생 단체에서 활동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단순히 시인이 아니고 독립운동가였던 셈이다.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윤 시인의 사촌이자 동갑내기로 수감 생활을 함께한 송몽규 선생은 “(윤)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다. 그 주사가 어떠한 주사인지는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윤 시인이 일제의 생체 실험에 목숨을 잃었다면 한국인으로서 분노를 금하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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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시샤대가 윤 시인의 80주기 기일인 지난 16일 고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올해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란 점을 감안한 정무적 판단에 따른 결정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재학 중 체포돼 숨진 윤 시인을 대학 측이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이 담긴 특별한 결정”이라는 도시샤대 측의 설명에 공감이 간다. 국력이 약해 수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게 만들고 또 외국에 나갈 수밖에 없도록 등을 떠민 못난 대한민국의 역사가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나마 윤 시인보다 한참 후배인 한강 작가(1993년 연세대 졸업)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위로가 된다. 연세대 응원단이 한 작가의 시를 가사로 한 응원곡을 만들면 어떨까.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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