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의 의미

2024-11-19

기원전 710년의 이야기다. 노나라 군주 환공이 송나라 대부 화보독이 보내온 대정(大鼎·진귀한 솥)을 받았다. 사욕으로 난을 일으켜 자기 군주를 갈아엎고 주변 국가를 무마하려는 뇌물이었다. 이를 본 노나라 대부 장손달이 환공에게 간언했다. “군주란 도덕을 밝히고 사악함을 막아서 백관을 감독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백관이 잘못을 범할 우려가 있으므로, 성명으로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임금 자신이 덕을 버리고 옳지 못한 자를 비호해서야 장차 백관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성명(聲明)’은 원래 교화의 소리와 문명의 밝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후로 한문 문장에서 ‘성명’은 대개 훌륭한 군주의 교화를 뜻하는 말로 사용해 왔다. “춘추의 의리는 죄를 성명하고 토벌하는 데에 있다”라는 말처럼 성토(聲討)의 의미가 더해진 경우도 간혹 있지만, 성명을 오늘날처럼 ‘어떤 일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한 게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지난달 28일 가천대를 시작으로 시국성명이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3주 남짓 동안 16개 대학이 각각, 그리고 2개 지역의 대학이 연합하여, 교수와 연구자들의 성명을 발표했다. 상아탑에 갇혀 세상물정 모르는 지식인들의 치기로 넘기기에는 매우 이례적으로, 단기간에 동시다발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성명서들의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준엄한 일갈로부터 정서를 파고드는 고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성명서만 모아도 역사의 한 장이 될 만하다.

장손달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노나라 환공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춘추좌씨전>의 저자는 환공에 대한 비판은 사실 서술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다음 논평의 인용으로 마무리했다. “장손달의 후손은 오랫동안 복을 누릴 것이다. 임금의 잘못을 내버려두지 않고 간했으니.” 복잡다단한 정국에 지식인들의 이런 성명이 무슨 실효를 지닐까? 그러나 올바른 정치의 기본을 드러낼 성명을 잃어버리고 그 의미조차 모르는 이 시대의 통치자에게 다시 공정과 상식을 강조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그러지 않고 어찌 이 ‘폐허 속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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