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석경의 <숲속의 방>은 150쪽 안팎의 길지 않은 중편소설이지만 1980년대 여성문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1985년 가을 ‘세계의문학’에 발표됐다가 이듬해 동명의 소설집에 수록된 이 작품은 1986년 작가에게 ‘오늘의작가상’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출간 3개월 만에 2만부가 팔려나간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후에도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은 이어져 초판 30쇄와 2판 6쇄를 찍었고, 2005년에 출간한 3판도 꾸준히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1990년대 초에는 공지영 각색, 최진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런 대중의 관심과 사랑에는 여성 독자와 여성 관객의 공감과 지지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열렬한 반응을 일으켰던 것일까? 소양이라는 문제적인 여주인공을 빼놓고서 이 작품의 대중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중산층 가정의 교육받은 딸’이라 할 수 있는 소양이 세상과 불화하며 자기를 찾기 위해 벌이는 투쟁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작품은 소양의 방황과 투쟁을 보다 현실적인 언니 미양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미양이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소양은 자신의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치명적 선택을 내린다. 미양의 눈에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동생의 모습은 “붉은 지도 위에 잠들어 있는 혁명가 같았다.”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순순히 걸어 들어간 언니와 세상의 어디에서도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고독한 혁명가로 생을 마감한 동생의 대조적인 모습은 1980년대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직면한 곤경을 압축하고 있다. 이 곤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정직한 응시, 그리고 그것을 뚫고 나가기 위해 한 단독자 여성이 벌인 투쟁에 대해 여성 독자들이 보여준 공감과 지지가 이 소설을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자기 해방 위해 내적 전투 벌이다 파괴적 결말
소양은 1990년대 공지영, 김인숙 소설에 등장하는 ‘운동권 여대생’에 앞서 대안적 여성 주체성을 모색했던 새로운 인물 유형이다. 그는 1980년대 집을 뛰쳐나와 공장과 광장으로 향했던 중산층 출신의 여대생들이 자신의 계급적 특권을 탈각하기 위해 치렀던 모순에 찬 투쟁을 선취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해방을 이루기 위해 치열한 내적 전투를 벌였던 단독적 개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소양은 여대생 운동권 문학의 계보와 연결돼 있지만, 그로부터 다소 빗겨나 한 개인으로서 자기를 찾으려는 무정부주의적 혁명가에 가깝다. 작품은 이 혁명가가 벌인 전투가 세상과 화해에 이르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 결말에 이르게 된 과정을 기록한다.
결혼이냐, 죽음이냐의 양자택일적 선택은 여성 소설의 오래된 문법 가운데 하나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아를 찾지 못하는 여성들은 억압적인 결혼제도 속으로 들어가거나 내면으로 퇴각하는 양자 선택에 내몰린다. 이중 후자의 선택은 자기 파괴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이 외부세계로 나아가 갈등을 겪다가 자신의 자아를 (부분적으로) 실현하는 페미니스트 교양소설은 서구에서도 20세기 중·후반이 돼야 도착한다. 페미니스트 교양소설은 가부장적 사회에 맞서는 ‘대항 공공영역(counter-public sphere)’이 마련돼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형식이다. 여성의 자유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여성운동의 성과가 일정 정도 자리 잡은 다음에야 대항 여성 공공영역은 창출된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대항 공공영역은 아직 뚜렷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주어진 사회적 테두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아를 찾으려는 소양의 노력은 파괴적 결말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소양의 일기를 몰래 읽고 동생의 고통을 이해하는 미양이 고백하듯이, “방황은 청춘의 특권이 아니라 형벌이다.”
소양은 가족을 혐오했고, 대학을 거부했다. 그의 가족은 세 딸을 명문대학에 보낼 정도로 유복하고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퇴물 유한계층으로 전락한 할머니, 생존만이 유일한 삶의 가치라고 주장하는 가부장적 아버지와 그런 남편의 물질적 바탕 위에서만 지성을 유지하는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어머니가 꾸려가는 속물적 공간이다. 대학은 사상과 지성의 탐구를 말하지만 실상 껍데기에 불과하다. 교수는 평생이 보장된 직장인일 뿐이다.
소양은 당시 대학가를 휩쓴 민중운동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그들의 운동에 동참할 수는 없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민중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의 시도에서 엘리트주의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운동권 여대생인 명주가 공장에 들어갈 때 그는 술집으로 간다. 그에게 술집은 무거운 청춘을 탕진하기 위해 바닥으로 내려가 자신의 부르주아 속물성을 깨부수는 또 다른 현장이다. 남자들과 하룻밤 성관계를 주저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다 남자들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그는 “데모를 하는 아이들 이상으로 과격해서 늘 데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설픈 민중 의식을 거부하고 뛰어든 소비의 공간이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일종의 해방구로서 종로에서 일어나는 소비행위는 경옥과 희중 같은 또래 젊은이들에게는 유쾌한 배설이 되지만, 소양에게는 자기 학대다. “종로도 내겐 한정된 수족관처럼 권태, 울분과 피비린내 나는 감각의 찌꺼기를 토하지만 나는 그러는 척할 뿐이다.”

자유롭고 독립된 여성 창조 위한 통과의례
소비적 배설을 통해서도, 민중적 저항에서도 자신을 찾지 못한 소양이 침잠해 들어간 곳이 밀폐된 자신의 방이다. 그는 “피 흘리는 작은 양을 잠재우고 놀라 뛰는 가슴을 쉬게 하고 내 푸른 단도 날까지 어루만져 주는 방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방에 꽃을 장식하고 촛불을 켠 뒤 검은 우산을 쓰고 홀로 누워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공간이 영혼의 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세상과 작별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일기장에서 그는 자신을 고립된 섬과 같다고 느낀다.
여기는 꿈이 아니야
날개는 없고 몸뚱이만 있는 척박한 땅이야
새가 아니고 나비가 아니고 땅을 전신으로 문지르고 다니는 뱀이야
날개는 환각이야
깨어지면 아프고 추한 몸뚱이야
(…)
나는 섬이야 어디와도 닿지 않는 함정 같은 섬이야.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동생의 비극적 죽음을 마주한 미양은 동생이 끝내 안식의 방을 찾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숲에도 방이 없었다. 숲에는 혼란과 미로가 있을 뿐.” 동생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미양은 끝내 동생의 파멸을 막지 못했다. 스무 살 무렵 미양은 서예실에서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를 입은 남자가 그를 납치해 폭력을 저지르려는 끔찍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다. 그는 취약한 남성성이 만들어내는 폭력성을 체험하면서 중산층 집안의 여대생이라는 자신의 특권이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 깨닫는다. 이 사건 이후 미양은 세상과 맞서는 일을 그만두고 보호해줄 남자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간다.
작가는 온건한 미양의 눈을 통해 소양의 급진성을 이해하도록 균형을 취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사회에 투항하는 대신 죽음에 이를 정도로 자신의 투쟁을 죽음으로 밀어붙인 소양에게 매료된다. <숲속의 방>에서 소양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후 강석경 소설에서 우리는 더 자유롭고 독립된 여성으로 성장하는 소양들을 만난다(<툰드라>의 주영,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의 재연).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자기 파괴적 혁명에 몰입하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와 제도, 도덕적 권력에 맞서는 “반체제”이자 “사랑에도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온 독립된 영혼”으로 우뚝 선다. 이런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을 창조하기 위해 한국 여성문학은 소양이라는 인물을 만나야 했다. 소양은 한국 여성문학이 통과해야 하는 필수지점이다.
<이명호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