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민 작가 그림책…판타지 모험담
‘시계로 변한 엄마를 구하러 나선 아이’

분 단위로 쪼개진 스케줄표에 따라 아이를 ‘라이딩’(데려다주기)하는 엄마들의 모습이 다큐와 드라마, 연예인 브이로그, 코미디 등을 가릴 것 없이 유행처럼 비치는 시대다. 이에 대한 비판도 부러움도 모두 어른들의 시선일 뿐, 어디에도 아이들의 목소리는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림책 <시계탕>(웅진주니어)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책은 비주류의 시선으로 사회의 이면을 담아낸 작품을 발표해 온 권정민 작가(45)의 신작이다.
“10분 내로 준비해.” “3분 후에 불 끄는 거야.” “1분 남았어.” 잔소리하던 엄마가 어느 날 시계로 변해버린다. 아이는 오랜만에 천천히 밥을 먹고 느긋하게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엄마의 재촉이 사라지길 기도한 아이는 기쁘기도 하지만, 답답하다. 아이에게 엄마는 자신을 통제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결국 엄마를 고칠 수 있다는 ‘시계탕’으로 모험을 떠난다. <시계탕>은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는 왜 아이를 통제할까. 지난 14일 서울 중구 덕수궁길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권 작가는 “불안”을 꼽았다. 권 작가는 “부모가 본인의 삶에 대한 불안을 느끼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인 아이를 통제함으로 불안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작업이 잘 풀리지 않던 시간 권 작가도 아이의 시간을 분 단위로 통제하며 관리한 적이 있다고 했다. 권 작가는 “그때 내 안에서 알람이 울렸다.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렇기에 그림책에서 엄마가 시계로 변한 것은 잔소리가 멈추길 소원한 아이의 기도로 인한 일종의 ‘저주’, ‘징벌’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방송작가 생활을 하다 2016년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보림)으로 그림책 작가로 데뷔했다. 난개발로 인해 산에서 쫓겨난 멧돼지 가족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한 사투를 유쾌하게 기록한 작품이다. 이번 작품까지 총 7권의 그림책을 냈다. 아기의 시점에서 엄마를 연구하고 기록한 <엄마도감>(웅진주니어)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도심 아파트에서 벌어진 기묘한 배달 소동을 그린 <사라진 저녁>(창비)으로 ‘대한민국 그림책상’을 받았다.
주로 아이와 엄마, 인간과 동식물 등 관찰자와 대상의 관계를 전복해 새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권 작가 작품의 특징이다. 그림책이지만, 풍자와 일종의 사회고발적 성격이 엿보이는 이유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나 <시계탕>도 아이의 시간을 통제하는 엄마와 속박에서 벗어나고픈 아이라는 소재가 ‘라이딩’이라거나 ‘7세 혹은 4세 고시’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 최근의 사회상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

권 작가는 “인문학이 인간의 이상한 모습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라고 생각하는데, ‘시계탕’도 그렇다. 사랑하지만 통제하고 싶은 ‘엄마’와 의존하지만 자유롭고 싶은 ‘아이’라는 복잡한 관계에 관한 얘기”라며 “엄마를 좀 벌주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있었던 아이들은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책의 말미에 작가의 말이 남겨져있다. ‘엄마는 가끔 고장이 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죠. 그땐 나사 몇 개를 풀어 주어야 한답니다.’ 물건이 고장나 나사를 좀 꽉 조여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외려 풀라고 한다. 그는 “비교가 일상이 된 사회다. 과도한 경쟁으로 끊임없이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요구들이 존재하는 복잡한 사회에서 무언가를 조금 덜어내면 조금 편안하지 않을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간 모든 책의 글과 그림을 직접 담당했다. 최근에는 컴퓨터로 작업하는 작가들도 많지만, 권 작가는 손으로 작업한다. 판타지 같은 모험을 담은 책이라 이번엔 그림에 더 신경 썼다. 환상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 초현실주의 거장들의 그림을 일부 녹여냈다. 르네 마그리트의 ‘잘못된 거울’,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등 그림책에 오마주한 작품을 찾는 것도 재미다.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같은 아이의 뾰로통해 보이는 표정이 귀엽고 안쓰럽다. 의문의 시계탕 할머니는 몇 장면 등장하진 않지만, 존재만으로 독자의 동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시계탕>은 17일 출간됐다. 권 작가 작품의 원화를 전시하는 원화전이 이달 25일부터 다음 달 26일까지 마포구 망원동의 한 독립서점에서 열린다. 원화와 함께 작가가 직접 만든 조각 등도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전시 기간 중 작가와 함께하는 북토크도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