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비사
제1부. 잘못 끼워진 6공 첫 단추
5회. 황태자 박철언, 5공 출신 창업공신 밀어내다

박철언 한마디에 뒤집힌 내각 인선
“박철언한테 연락해 봐라.”
1988년 2월 17일 노태우 당선인은 삼청동 안가에서 6공 조각을 마무리하는 최종회의 막바지에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를 찾았다. 회의 참석자 3명(이현재 총리 내정자, 홍성철 비서실장 내정자, 이춘구 취임준비위원장)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통과의례처럼 생각됐던 최종회의가 난관에 부닥쳤다. 대통령의 고향인 TK(대구·경북) 출신이 너무 많았다. 주요 장관인 내무·재무·법무·국방이 모두 TK 출신이었다. 노태우는 ‘국민 화합’ 차원에서 인사의 ‘지역 균형’을 강조해 왔다. 대통령의 경북고 후배인 정해창 법무장관을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다 정리돼 가던 밤 10시 갑자기 당선자가 박철언을 찾은 것이다.
청와대에 도착한 박철언은 “법무부와 검찰은 서열을 중시하는 조직입니다. 서열상 정해창이 맞습니다. 임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 바꿔야 한다면 국방장관을 바꾸시죠”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정해창은 법무장관이 됐고, 얼마 후 노태우 대통령비서실장 자리에 올랐다. 국방장관은 경기도 출신 오자복 전 합참의장으로 바뀌었다. 오자복은 육사 출신도 아니고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지도 않았기에 장관 임명은 파격이었다. TK출신이자 노태우의 친구인 김윤환의 경우 정무장관으로 확정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2월 19일 조각 발표에서 뺐다. TK 출신을 한 명이라도 줄이려는 눈속임이다. 김윤환은 대통령 취임 후인 3월 7일 임명됐다.
전형적인 6공 스타일이다. 대통령은 스스로를 감추었고, 박철언은 주저 없이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 한 관계자는 “당선인이 박철언을 부른 것은 최종회의에 올라온 내각 명단을 사전에 박철언과 얘기해 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걸 바꾸려니까 다시 박철언의 감수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박철언이 진짜 신경썼던 것은 청와대 인사였죠. 청와대에서 오래 근무해 봤던 박철언은 장관은 허수아비고, 수석비서관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박철언 본인도 처음부터 청와대로 들어가려고 했죠”라고 말했다.
박철언의 청와대 입성 우여곡절

대선 승리 직후 노태우 당선인은 취임준비위원들을 불러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청와대 구성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물었다. 취임준비위원장 이춘구는 육사 14기, 나머지 위원들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 시절부터 보좌해 온 민간인 핵심 참모들이었다. 한창 토론 분위기가 올랐을 때 노태우 당선인이 서류봉투를 꺼냈다.
“이것도 한번 검토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