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혜경 제주연구원 부연구위원/논설위원

침묵이란 무엇인가? 소리나 말이 없는 상태, 발언이나 응답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태도. 이런 것을 가르키는 단어가 ‘침묵’이다. 침묵에 대한 고찰은 시대마다, 사회마다, 영역마다 맥락을 달리하며 이루어져 왔다. 침묵은 ‘단순히 말하지 않음’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우리가 입을 다물 때, 비어 있는 공간에는 오히려 더 많은 의미가 떠오른다.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충만이며, 부재가 아니라 잠재이다.
침묵을 언어와 존재의 경계로 이해한 실존주의자 하이데거는 “말할 수 없음 속에서 인간은 존재의 근원과 마주한다”고 보았다. 그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침묵은 그 집의 빈 방일 수 있다. 언어가 끊어진 그 자리에 존재는 고요히 모습을 드러낸다. 말로는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침묵은 그곳을 향한 길이다. 마치 어둠이 있어야 별빛이 빛나듯, 침묵이 있어야 언어의 진정한 힘도 드러난다.
종교적 전통에서도 침묵은 특별한 의미를 지녀왔다. 불교에서 묵언은 세속의 소란을 끊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수행이다. 기독교 신비주의에서는 침묵이 곧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조건으로 여겨졌다. 인간의 언어가 닿지 않는 자리에서, 신성은 침묵을 매개로 우리를 찾아온다.
예술에서 쉼표나 무음은 오히려 강한 긴장과 의미를 부여하며, 문학에서 말하지 않음이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회화나 연극에서도 ‘침묵의 순간’은 감정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한다. 또한 관계에서 상대방을 기다려 주는 여백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침묵은 늘 숭고한 것만은 아니다. 사회 속에서 침묵은 때로 폭력의 동조가 된다. 부당함을 알면서도 침묵할 때, 그 침묵은 권력의 또 다른 언어가 된다. 반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저항이 되기도 한다. ‘침묵의 행진’은 아무 말 없는 목소리로 세상을 울린다. 이렇듯 침묵은 수동과 능동, 순응과 저항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품고 있다.
이런 침묵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결국 맥락에 달려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침묵은 결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는 점이다. 침묵은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 언어가 다하지 못하는 것을 품는다. 그것은 때로는 사유의 깊은 자리이고, 때로는 신비와 진실의 문턱이며, 때로는 사회적 행위의 날카로운 선언이다. 따라서 침묵은 의미, 감정, 사유를 담는 적극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침묵은 우리에게 묻는다. 왜 침묵하는가? 그 침묵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침묵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언어와 존재, 나와 세계의 관계를 성찰하게 된다.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래 머문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수많은 침묵 속에 살아간다.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때로 책임이 숨어있고, 때로는 무수한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침묵은 사회가 강요한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선택한 고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침묵은 끊임없이 우리를 질문하게 하고, 다시 사유하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침묵이 깨져 말을하려는 순간, 그 울림은 사유의 깊이만큼 더 크게 진동한다.
역사는 수많은 침묵으로 이루어져 왔다. 기록되지 못한 목소리들, 말하지 못한 진실들, 그 모든 침묵이 역사의 공백을 이루었다. 때로는 그 공백이 언젠가 터져 나와 세상을 뒤흔드는 울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현재의 침묵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