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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제작 시기인 2024년보다 불과 30년 뒤인 2054년으로, 공간적 배경은 니플하임 행성에 발을 내딛기 일보 직전 지구인들이 타고 있는 우주선이다. 지구의 사람들은 니플하임으로 이주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며 트럼프를 연호했던 미국인들처럼 우주선장인 마샬을 흠모하며 우주선에 오르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우주선에 뛰어드는 또 다른 사람들의 다수는 다리우스로부터 다급하게 피신하는 이들이다. 고리대금업자인 다리우스는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온몸을 도륙하며 서서히 괴롭게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기쁨을 느낀다. 팔다리를 잘려가며 죽기 싫어 우주선으로 도망치는 빚쟁이들 가운데 미키가 있다. 이들에게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공포다.
미키는 죽기 싫어 지구에서 도망쳤지만 어찌나 다급했는지 계속 죽어야만 하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만다. 영화 포스터에서 언급하듯 ‘아파도’ 일하다 죽고, ‘숨 막혀도’ 일하다 죽고, ‘유해해도’, ‘독해도’, ‘외로워도’, ‘추워도’, ‘더러워도’, ‘X 같아도’ 일하다 죽고 또 죽는다. 기가 막힐 정도로 얄밉고 영악하기 짝이 없는 마케팅 수법이다. 뉴진스 사태 때 민희진 씨를 ‘보통’ 노동자 프레임으로 엮은 것과 똑같다.
그래서 도입부에서 일하다 잘려 나간 미키의 손이 우주선 안에서 만찬을 즐기는 사람들 너머로 유유히 흘러가는 장면에서도 그다지 아이러니 미학을 느낀다거나 신선하지 않다. 우리 노동자들을 소모품 취급하는구나 싶다가도 익숙한 풍자적 장면이라 2200억짜리의 기대에 못 미치기도 하고, 이 영화가 모든 포스터에 노동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은유할 만큼의 노동 영화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 봉준호‘적’ 장면이 나올 것인가를 계속 기다리다 지쳐버리고 만다.
영화는 책보다 미키를 더 많이 죽인다. 포스터에 한정한다면 더 많은 노동자의 희생 사례 수를 위해 그런 것 같다. 여섯 명보다는 열여섯 명의 희생이 훨씬 더 자극적이고 과격하니까. 이게 아니라면 도무지 17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미키 7: 반물질의 블루스>에는 미키 7 이전의 몇몇 미키가 여전히 살아서 ‘혹사당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다가 죽은 줄 알았던 미키 17 뒤에 또다시 복사된 미키 18은 지금까지의 수동적 미키와 다르게 거칠면서도 영웅적인 모습을 보인다. 극 중에서도 갑작스러운 인격의 변화라거나 돌연변이처럼 취급하고 있지만 미키 17과 미키 18은 <파이트 클럽>(1999, 데이빗 핀처)의 잭(에드워드 노튼 분)과 테일러(브래드 피트 분)의 관계와 같이 한 사람의 두 인격 또는 두 면모와 같다.
때마침 이 영화의 제작자가 브래드 피트다. 그는 자신이 이끌리는 작품만 하는 독특한 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명성에 비해 그의 필모그래피는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점이 있다. <스내치> (2001, 가이 리치)를 보라. 마돈나의 남편이자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1999)의 감독이라 해도 브래드 피트가 사투리 팍팍 쓰며 조연급으로 나올 영화는 아니지 않나.
브래드 피트는 <옥자>(2017, 봉준호), <미나리>(2021, 정이삭) 제작에 참여한 바 있고, <버닝>(2018, 이창동)에서 연쇄살인마로 출연하고 <미나리>에서 미국 이민자로 등장한 스티븐 연과도 인연이 깊다. 스티브 연은 이 영화에서 다리우스의 채무자이자 미키를 배신하려는 인물로 등장한다.
현실에서는 강한 ‘놈’이 살아남는데 플롯이 있는 모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강한 미키 18은 연약한 미키 17을 위해, 니플하임의 원존재 크리퍼와 우주선의 지구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그러고 보면 모두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자들은 언제나 돈키호테 같은 유쾌한 자이거나 아킬레스와 같은 용맹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언제나 세상을 안전하게, 그리고 발전적으로 변화시킨다.
정치인 마샬이 쇼맨십을 발휘하려 카메라를 대동하고 우주선에서 나갔을 때 우주선을 점령한 반군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나샤(미키의 연인)는 니플하임 원주민인 새끼 크리퍼를 구할 수 있었고(이 장면이 가장 할리우드적이다), 우주선장 마샬과 그를 치마폭에 감싼 부인을 진압할 수 있었다. 빨치산(파르티잔; partisan)은 정의로움과 행동이 미덕이지만 독재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반군은 비위도 좋아야 한다. <돈 룩 업>(2021, 아담 맥케이)에서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처럼 적진의 한가운데서 간첩이 되어야 한다.
니플하임의 원주민인 크리퍼는 지금까지 영화에서 등장한 에일리언 가운데 가장 친근감이 들고, 그 새끼는 귀엽기까지 하다. 아마도 다지류(多肢類)의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가느다란 다리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단순화한 몽톡한 다리와 인간의 목소리와 비슷한 음성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폭력적인 인간에게 위협을 받는 모습이 88서울올림픽 때의 상계동 사람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억울함을 대입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열 받은 크리퍼들이 우주선을 에워싸고 고음을 내지르거나 엄청난 무게감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영화에서 정치인들은 쇼맨십 가득한 광대로 묘사하고 있고, 부인의 치마폭에 싸인 통치자 마샬은 결정 능력도 없는데 어쩌다 내린 결정도 부인이 바꾸면 이내 말을 바꿔버린다.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서울구치소의 현직 대통령과 불법 증·개축한 한남동의 그 부인을 떠올리고 만다. 여기서 감탄사가 터져야 하는데, 불쾌하다. 감독은 불리할 때 납작 엎드려 있다가 안전하다 싶으니 여기저기 나서서 정의를 부르짖고 있으니까. 이전의 대통령 탄핵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비겁이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더 많은 영화미학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극장을 나설 때 마음이 그렇게도 찜찜한 게다.
더 이상 봉준호는 이전의 봉준호가 아니다. 그는 더 이상 대중에게 실체가 아니라 플라톤의 동굴에 비친 그림자 같은 존재가 돼버리고 말았다. 부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의 장선우나 <살로, 소돔의 120일>(1965)의 파졸리니가 되진 않기를.
추신.
미키는 개봉 당시 엄청나게 주목 받았던 <트와일라잇>(2008, 캐서린 하드윅)의 미국형 또는 전 세계적 아이돌형 미남 배우 로버트 패틴슨이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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