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세 살 즈음이었나, 집안에 송사가 났는데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듣다 크게 놀랐다. 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면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한참 곱씹다가 혼자 결론 내렸다. 어른들이 잘못 알았을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만일 사실이라면 재판에서 이겨야 할 사람이 억울하게 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데, 존경받아 마땅한 듯 고고하고 대단해 보이는 법관들이 도저히 그런 일을 할 것 같지 않았다.
몇살 더 먹고 ‘전관예우’라는 게 실제 존재한다는 걸 알았으나 그 부조리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한참 더 지나 스스로 납득해 보려고 만든 이유는 이런 것이다. 그 행위에 참가하는 법조인이라고 공공선의 감각이 전혀 없을 리는 없다. 다만 우선하는 공공선이 일반 대중의 것과 다를 뿐이다. 즉, 최고 엘리트라면 그에 맞는 부를 누려야 하는데 판사는 재직 중에는 그럴 수 없으므로 퇴직 후에라도 서로 도와 채워주는 것이 옳다, 이런 가치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 판사님 오래 고생하셨으니 이제 좀 편하게 사셔야 맞죠” 하는 말을 나누며 서로 합리화하는 거라고, 그렇게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여전히 궁금하다. ‘그들만의 리그’ 바깥의 사람들에게 전관예우는 조금도 공공선이 될 수 없는데, 그저 “세상이 원래 그래” “억울한 일 안 당하고 살려면 너도 출세해”라고 받아들여야 할 뿐인데 정말 이런 현실을 모르는지.
게다가 이 현실은 많은 사회 현상들과 연결된다. 얼마 전 초중고생 사교육비 지출이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통계가 발표됐다. 그 원인을 의대 증원 불확실성, 수능 킬러문항 배제 등 윤석열 정부 정책 실패에서 찾는 기사들이 보인다. 윤 정부가 뭔들 잘했으랴마는 그래도 근본 원인이 거기 있을까 싶다. “억울하면 출세해”라는 말이 한시도 부정된 적 없는 사회에서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어떻게든 앞줄에 세우려 애쓰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사교육 시장은 그런 욕망과 불안을 적당히 자극해 왔을 뿐이다. 며칠 전에는 현대제철 20대 노동자가 안전장비 없이 일하다 추락사했는데 누구도 현대제철 대표가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처벌될 거라 믿지 않는다. 지금껏 대기업 대표가 처벌된 예가 없기 때문이다. 보수언론들은 이 법을 없애려 오늘도 노력 중인 가운데, “구직활동 않고 ‘그냥 쉬는’ 청년 백수 120만명”이라는 기사도 내보낸다. 이 세 가지 사안이 모두 같은 현상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걸까?
최근엔 “판사를 인공지능(AI)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들린다. 윤 대통령 구속 취소 직후에는 나도 솔깃했다. “저 판사가 나중에 뭘 하려고…” 하는 의문에 에너지를 쓰는 게 아까워서다. 안타깝게도 AI 판사가 더 공정하다고 보장할 순 없다고 한다. 인간 판사의 판례를 그대로 재현하는 게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게 하려면 알고리즘을 조정해야 하는데, “출세한 사람도 똑같이 처벌하라”는 명령을 누군가는 넣어야 한다. 결국 사람이 결정하고 책임질 일인 것이다.
그러니까 AI 판사 운운은 AI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법조인들이 그들만의 공공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공공선을 지키는 사회를 원한다는 이야기다. 이번주는 특히 그런 소망을 간절히 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