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별 헤는 밤’, 윤동주
시인 윤동주가 83년 전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시를 읊은 때가 바로 요맘 때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인 1941년 11월 5일이었으니 말이다. 이후 윤동주가 센 밤하늘의 별은 일제하에 힘들던 우리 민족의 마음에 박힌 별이 되었다. 그러기에 일제에서 벗어난 지 8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국민의 애송시로 남아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의 하늘은 구름을 븻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별 또한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 '별' 이병기
1891년생으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고 수많은 시조를 남긴 가람 이병기 선생이 쓴 ’별'이란 시는 1965년 음악 선생이던 이수인에 의해 곡이 붙어 3년 뒤 가람이 돌아가신 후 갈수록 애창되어 이제는 국민가곡이 되어 있다. 이 가을 가람 이병기가 생각나는 것은 가람이 본 별 때문만은 아니라 그가 몸으로 느낀 그 계절이 왔기 때문이다.
들마다 늦은 가을 찬 바람이 옴즉이네
벼 이삭 수수 이삭 으슬으슴 속삭이고
밭머리 해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무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두고
젖 먹는 어린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쁠 줄을 모르네
... '저무는 가을' 이병기
가을이라고 남쪽으로 여행을 나온 나그네에게 가을 들판에서 한창 벼 거두는 일을 하다가 아기에게 젖 먹이려고 논두락에 나와 앉은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지금 눈앞에는 텅 빈 논, 기계화로 직선으로 다듬어진 논두락이 보일 뿐이다. 그렇게 달라졌구나. 밤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람이 본 별도 잘 보이지 않고 들판의 정경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구나.
이제 날이 제법 차가워져 별을 본다고 밤늦게까지 나와 있기는 쉽지 않구나. 그래도 별을 보고 싶은 마음에 창문을 열고 건물 사이로 발을 내디뎌본다. 거기에 시인 윤동주가 대화를 나누던 귀뚜라미의 수십 대 손자들이 얼마 전까지도 울었던 여운이 남아있다.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귀뚜라미와 나와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 ‘귀뚜라미와 나와’. 윤동주
여름의 전령사라는 매미 소리를 들은 게 금방인데 어느새 가을의 전령사인 귀뚜라미 소리도 멀어지고 있구나. 계절이 가을 속으로 한참 줄달음쳐 왔다는 것 아닌가?
귀뚜라미는 사람냄새가 그리워 저리도 간절하게 울었다고 하던데, 귀뚜라미만 그럴 것인가? 우리는 가을이 되면 사람이 그리운 것은 더 하면 더 했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네. 시인들은 이런 우리 속인들의 마음을 잘도 알고 그것을 토해낸다네
“사람이 봄과 여름철에는 마음이 즐겁고 가을과 겨울에는 근심이 쌓이는데, 이는 계절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 ‘서경부(西京賦)’, 장형(張衡)
슬프다, 가을의 절기여!
쓸쓸한 가을바람에 초목이 떨어져 시들어가니,
처량해라 먼 길 떠난 길손의 심정이라 할까
높은 산 올라 물 굽어보며 귀향객 보내는 기분일세
텅 빈 하늘은 드높고 대기는 청명하고
고요히 흐르는 가을 물은 맑기도 하다.
마음이 아파서 탄식하는데 차가운 기운이 내 몸에 스며든다.
날이 밝아오지만 홀로 뜬눈으로 꼬박 새우니
귀뚜라미만 밤길에 슬피 운다.
... '구변(九變)' 송옥(宋玉)
어느새 11월도 한 참 달리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은 어디론가 움직이는 길손처럼 변하고 그 상황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더욱 사람을 서글프게 하였다. 드디어는 아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구나. 출근하는 볼따구니에 찬 바람이 몰아치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무의식적으로 비명을 토해낸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가지에 잔뜩 매달려 웃을 때는 아름답고 멋있는 이 가을이 추워지면서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금빛 비늘을 귀찮아하는 마음으로 변하는구나. 그러기에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문득 일 년을 그냥 보낸 것이 아니냐며 낙담하고 그만큼 삶을 허비한 것이 아니냐며 마음이 처연해진다. 그러고는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좌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연의 질서는 늘 아름답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난화로 기후변화로 올해 세계도, 우리나라도 몸살을 앓았지만 그래도 더운 여름을 뒤로 하고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와 이미 한참 지나고 있다. 사계절의 질서가 이렇게 아름답고 무서울 수가 없다. 대자연의 섭리 앞에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며 숙연해지는 지금이다.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자연에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11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