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아버지의 희생이 담긴 지게

2025-05-06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면 주인공이 고향 개성을 떠나 서울 서대문형무소 근처 현저동으로 이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녀는 서울역전에서 지게꾼을 시켜 짐을 나르게 하는데 현저동 집은 달동네에 있었다. 지게꾼은 “사람들이 겨우 비비고 지날 만한 실 같은 골목을 한참이나 더 꼬불대며 오르다가 다시 첫번째 층층다리보다 더 불규칙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지나” 겨우겨우 초가집 앞에 도착했다. 지게는 골목이 좁거나 비탈이 심해 차나 리어카 또는 인력거나 자전거가 드나들 수 없는 지역에도 짐을 나를 수 있는 최고의 운반수단이었다.

한국의 어머니상이 머리에 수건 쓰고 밭고랑 사이에 앉아 호미질하는 모습이라면 한국의 아버지상은 지게 지고 논밭 사이를 소 끌고 가는 모습이다. 지게는 조선시대의 기록에 보면 지가(支架)·지거(支

)·지거(枝擧)·지기(支機)·가자(架子) 또는 배협자(背狹子)·배가자(背架子)·배물가자(背物架子) 등으로 표기돼 있다. 지게의 명칭은 내용물에 따라 부르기도 한다. 물을 옮기는 것은 물지게, 분뇨를 담으면 똥지게, 항아리를 지면 독지게라고 불렀다. 어린이들이 지는 애기지게, 바소쿠리를 얹어 쓰는 바지게, 해초를 운반하는 맘지게, 돌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돌지게, 못자리에서 쪄낸 모를 옮길 때 쓰는 모지게 등도 있다. 지게는 때로 시신을 옮기는 도구로도 활용됐다.

우리 민족이 지게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고분에서 ‘짐을 나르는 인물 토우’에 지게 진 모습이 등장한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지게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그림에서는 김홍도·김득신·오명현·권용정·김준근 등의 풍속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게는 사용자의 몸에 맞춰 제작했기 때문에 형태나 크기가 생업환경과 자연환경에 따라 조금씩 달랐고 만드는 방법도 다양했다. 소나무나 노간주나무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가지가 약간 위로 뻗어난 자연목 두개를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도록 세운 다음 몸에 맞춰 고정시켰다. 등이 닿는 부분에는 두툼한 등태를 달아 살갗이 배기지 않도록 했고, 작대기를 새장에 걸어서 지게를 세우도록 했다.

손택수 시인의 ‘아버지의 등을 밀며’라는 시에는 아버지가 쓰러지고 난 다음에 아버지의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도록 지게 자국이 난 것을 본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조차 보여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상처였다. 그래서 지게를 보면 한평생 가족이라는 짐을 짊어지며 살았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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