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대폰이 내 손에 처음 들어온 건 1999년이었다. 그전에는 집 전화나 공중전화, 삐삐(무선호출기)를 사용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벽돌만 한 시티폰을 으스대며 사용했다. 동창 녀석이 그걸 가지고 명절에 나타나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좀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삐삐로 연락이 오면 긴 줄이 서 있는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그 줄의 꽁무니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시티폰의 뒤를 이어 아담한 휴대폰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쌌다. 갖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다. 삐삐에도 각자의 호출번호가 있었을 텐데 기억나지 않는다. 사용법도 가물가물하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녹음돼 있었는지 아니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지 헛갈린다. 통신수단의 빠른 변화 때문일 것이다. 새 기계를 쫓아가야지 지나간 기계의 사용법을 기억해서 무엇한단 말인가. 휴대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벌어진 가장 큰 변화는 메모용 수첩이 바뀔 때마다 주소란에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 번호들은 모두 휴대폰 속으로 들어갔다.
삐삐·시티폰 거쳐 휴대폰 시대
만능 기계지만 나를 잃어버려
있으면 걱정, 없으면 부러우니

사용료 부담은 있지만 휴대폰은 매우 유용했다. 집 전화는 가족들 옆에서 민감한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긴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변했을 때 언성을 높일 수도 없었다. 휴대폰은 그 모든 게 가능했다. 게다가 작은 화면이었지만 카메라 기능도 있었다. 어디를 가도 손에 들거나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잃어버리거나 고장 내지 않으려고 각별히 신경 썼다. 한 번은 개울로 밤낚시를 간 적이 있다. 이 바위 저 바위를 옮겨 다니며 낚시하던 중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옆의 바위로 건너뛰었는데 그곳 역시 물때로 미끄러웠다. 급하게 다음 바위로 뛰었지만 결국 다리에 상처까지 내며 물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물에 젖지 않은 오른손엔 자유의 여신상처럼 밤하늘을 향해 휴대폰이 횃불을 밝히고 있었다. 휴대폰을 살릴 수 있다면 몸에 상처가 조금 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려고 바위 위를 뛰어다녔던 것이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휴대폰 기능은 점점 좋아지더니 컴퓨터나 다름없이 변모했다. 언제 어디서든지 메일을 보내고 받았다. 돈을 보내고 받은 돈을 확인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시각각 확인했다. 글을 쓰다 막히면 즉각 검색해 해결 방법을 알아냈다. 나무들과 꽃의 이름을 현장에서 밝혀냈다. 어느 음식점 맛이 좋은지, 어느 길로 가야 지름길인지를 알려주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릴 때, 엘리베이터에 낯선 사람과 함께 탔을 때, 자동차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춰 있을 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깊은 밤잠이 오지 않을 때 휴대폰은 손바닥 안의 우주처럼 날개를 펼쳐주었다. 친구 같고 애인 같고 선생 같으니 떨어지려 해도 떨어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손에 들고 있어야, 머리맡에 놓고 자야 마음이 놓였다. 가까운 사람보다 더 친밀한 무엇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게 탈이 될 줄 미처 몰랐다.
집을 나섰다가도 휴대폰을 두고 온 걸 알게 되면 차를 돌렸다. 다른 도시에 갔다가 돌아올 때 고속도로에 들어선 뒤에야 휴대폰을 두고 왔다는 걸 알고 다음 요금소에서 차를 돌려 일행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택시에 두고 내렸을 땐 돌아올 때까지 전전긍긍했고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땐 마치 공황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옆에 누가 없으면 기억하는 번호가 없어 집 전화조차 사용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내 번호만 기억한다. 더더욱 한심했던 건 휴대폰이 없는 동안 중요한 전화들이 걸려 왔을 테고 내게로 올 소중한 기회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렵사리 내 손으로 돌아온 휴대폰을 열어보니 내가 건 부재중 기록만 있었지 한 통의 전화, 문자도 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영영 돌아오지 않은 휴대폰도 있었는데 그때 내 마음은 거의 백지나 다름없었다. 마치 나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아니, 내가 휴대폰의 노예가 돼버린 것 같았다. 그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 상상하니 온몸이 발가벗겨진 듯 소름까지 돌았다. 그걸 악용까지 한다면…. 그 유심(USIM)이 저 유심(唯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요즘 휴대폰 속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다는 불안은 지울 수 없다. 대관령의 아버지는 언젠가 취해 들어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동네에서 개들하고 나만 휴대폰이 없어!”
김도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