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혁신 필요한 ‘87년 체제’

2025-01-12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2012년 제18대 대선을 취재하러 온 일본 기자로부터 “이번 대통령의 역할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받았다. 시대적 소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이었다. ‘조정자’라고 답했다. 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척척 돌아가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의미였고,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강력한 정부 인사권과 국회 의결 비토권을 토대로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불리긴 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6공 헌법으론 끝없는 정쟁 못막아

권력 쏠림 막는 제도적 장치 필요

대통령은 대화·협치 조정자 돼야

어느새 정치권은 물론 국민 사이에도 보수와 진보 또는 우파와 좌파 진영이 복지를 놓고 뜨거운 논쟁과 대립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대통령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권력 총량의 법칙이랄까, 그 힘은 국회가 가져가기 시작했다. 이미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했고,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 인용 판결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나 감옥으로 갔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세 번째 사례다. 국회가 정족수를 확보하면 대통령은 언제든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정치적 구조가 짜여 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면서 이렇게 지위가 취약해진 것은 왜일까. 낡은 헌법에 그 원인이 숨어 있다.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로 출범한 지금의 제6공화국 체제로는 역동적 한국 사회를 지탱하기 어려워졌다.

대통령이 거듭 탄핵당하는 취약성이 드러났는데도 제왕적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유는 헌법상으로는 대통령이 여전히 무소불위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국민을 놀라게 한 계엄령은 전형적인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이다. 헌법 제77조는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법률이 정하는 대로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4일 나왔던 포고령 1호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을 비롯해 29차례의 줄탄핵을 하고, 예산 심사 폭주를 벌인 것은 윤 대통령이 견디기 어려웠을 거대 야당의 국회 권력 행사였다. 그렇다고 해도 계엄을 발동해 국회에 병력을 투입하고 포고령으로 언론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은 국민이 용납하기 어렵다.

계엄령은 고도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한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한국의 극심한 정치 혼돈을 지켜보고 있는 해외에서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세다. 거대 야당의 국회 권력 폭주가 아무리 지나쳐도 계엄령은 G7(주요 7개국) 급의 국가에선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주의 가치 아래 한국·이스라엘을 핵심 동맹으로 치켜세웠는데 이들 국가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국가 최고 책임자의 강경한 행동이 민주주의 질서와는 괴리가 있다는 점을 꼬집은 대목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한국 정치권의 극단적 정쟁은 불장난”이라며 혀를 찼다. 북핵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한국이 정쟁으로 밤낮을 허비하자, 이건 아니라는 투의 걱정을 일본에서도 하는 형국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쌓아 올린 국격은 다수당의 과도한 국회 권력 폭주와 느닷없는 대통령의 계엄으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지금 정상화되더라도 한국은 민주주의가 불완전한 나라라는 낙인이 한동안 지속할 것 같다.

이런 처지에 내몰린 건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헌법, 그리고 이로 인해 오히려 과거로 퇴행하는 정치문화 탓이 크다. 대통령이 헌법에 따라 계엄을 발동했지만,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계엄 당일 계엄령은 녹슨 칼이라는 걸 국민이 파악하는 데는 불과 두세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헌법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 그간 1공화국부터 5공화국까지는 길어야 10년 남짓이었다. 시대는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지금 1987년 성립된 헌법을 쓰고 있다. 총 130조로 된 헌법에서 대통령에 관한 조항은 무려 20개에 이른다. 과감한 혁신이 필요하다.

4년 중임제든, 내각제든, 분권형 대통령제든 대통령의 권력 분산과 다수당의 권력 폭주를 막는 장치를 헌법에 넣고 7공화국을 열어야 한다. 무엇보다 협치가 가능한 정당 제도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의 굴레에서 벗어나 대화와 협치의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바꾸든 막장 정치가 끝나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지금의 정치 문화로는 백약이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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