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작은 정원 ‘클라인가르텐’, 약자 텃밭 겸 시민 휴식처로 인기
한국에서 독일 모델로 수입한 도시 텃밭은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져

[주간경향] 독일 남서부에 있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카를스루에. 라인강을 경계로 프랑스와 닿아 있는 이 도시엔 주민 30만 명이 산다. 지난 4월 2일(현지시간) 카를스루에 라인강변에 있는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 단지를 방문했다. 클라인가르텐이란 ‘작은 정원’이란 뜻으로, 독일에서는 도시 텃밭을 말한다. 이 동네에 사는 노르베르트가 아침부터 나와 밭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단지에는 네모반듯한 텃밭 구획이 122개 있는데, 노르베르트는 한 구획을 빌려 텃밭 농사를 짓는다. 구획당 면적은 300㎡(세로 25m Χ 가로 12m·약 90.75평)이다.
이곳에서 그는 양파, 비트, 딸기, 상추 따위를 키운다. 독일 연방 클라인가르텐법(BKleingG)에 따라 재배 공간은 전체 면적의 3분의 1 이상이 돼야 한다. 나머지는 오두막, 벤치, 수도, 작은 나무 등으로 채웠다. 오두막은 잠시 쉬는 용도일 뿐, 거주하며 생활하는 건 금지돼 있다. 화장실도 설치할 수 없어 ‘아이스박스’처럼 생긴 간이 변기를 두었다.

노인·장애인·이주민들의 휴식처
노르베르트가 햇빛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그늘막(퍼골라)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난주에 저 퍼골라를 만들었어요. 은퇴하고 시간이 많거든요. 지금은 어떤 게 또 우리 텃밭에 어울릴까 생각 중이에요. 어머니가 95세인데 여기 오는 걸 정말 좋아하시죠. 아내도 곧 정년이니까 그땐 다 같이 텃밭에 올 수 있겠네요.”
클라인가르텐은 아파트 등 다세대주택에 거주해 정원이 없는 시민들이 주로 신청하는데, 고령층이나 장애인, 이주민 가족에게 우선권이 있다. 텃밭 회원이 되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무기한으로 쓸 수 있다. 임차료와 회비, 수도·전기 요금 등 포함해 1년에 370유로(약 58만 원) 정도 비용이 든다.


부활절을 3주 앞둔 이 날, 나무마다 달걀 장식과 토끼 인형이 걸려 있었다. 단지에 입주한 회원들이 꾸몄단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 통역사 김미란씨가 “부활절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정원을 꾸민다. 손주들이 놀러 오면 정원 곳곳에 달걀, 토끼 모양 초콜릿을 숨겨두고 찾게 한다”며 “독일의 정원문화”라고 설명했다. 단지 옆에는 가톨릭이 운영하는 탁아소가 있는데, 이곳 아이들도 놀러 온다. 텃밭 회원들은 아이들을 위해 단지 내에 놀이터를 만들었다.
클라인가르텐은 19세기 독일의 의사 모리츠 슈레버가 도시 빈민층 환자들에게 “맑은 공기와 햇빛을 충분히 쐬고 신선한 채소를 먹으라”고 권한 데서 유래했다. 그의 뜻을 기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텃밭이 만들어진 게 클라인가르텐의 시작이었다. 1·2차 세계대전 때는 도시에 감자와 채소를 공급하는 농지로 쓰였다. 지금은 사회적 약자들의 텃밭이자 도시민들의 휴식처, 열섬 현상을 막는 녹지의 기능으로 주목받는다.
이날 방문한 클라인가르텐은 1947년 만들어진 ‘라인슈트란트지들룽(라인강변 정착촌)’ 단지였는데, 칼스루에시 녹지관리국이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단지는 도시의 ‘칼트루프트라이트반(냉기 이동로)’이다. 시 외곽과 도심을 연결하는 지역에 있어 도시 외곽의 차갑고 깨끗한 공기를 도심으로 들여보내는 통로 역할을 한단다.
독일 연방법은 클라인가르텐을 ‘공공녹지’로 분류하고, 도시 계획상 폐쇄할 때는 가능한 한 대체 부지를 찾도록 했다. 이에 독일의 도시마다 클라인가르텐 단지가 수십~수백 개 만들어졌다. 대부분 주거지역에서 걸어서 10~15분 거리에 있다.
카를스루에에는 지자체와 철도청 소유의 땅에 클라인가르텐 단지가 99개 있다. 전체 면적은 309㏊(93만4725평), 임차 가능한 구획 수는 8890개에 달한다. 2022년 기준 카를스루에 총가구(17만2687가구) 중 약 5.51%가 텃밭을 분양받은 셈이다. 단지마다 임차받은 주민들이 협회를 만들어 해당 단지의 규칙 등을 정하고 비영리로 운영한다. 이들 협회가 모여 시·주·연방 조직을 이룬다. 고령자, 이주민, 장애인 등으로 구성된 회원들은 주기적으로 모이고, 독거 노인을 위한 커피 모임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카를스루에시 클라인가르텐협회(BVKA) 회장을 역임한 알프레드 뤼튼은 “텃밭 회원들의 만족도가 높다. 워낙 인기가 있어서 분양받겠다고 줄을 선 대기자가 카를스루에에서 5600명쯤 된다”고 말했다.
울타리 사라진 텃밭
한국에도 클라인가르텐이 수입됐다. 2011년 제정한 ‘도시농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클라인가르텐 모델이 주요 참고 사례로 꼽혔다. 당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독일 현장을 견학하고 돌아온 뒤, 도시 텃밭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도시 안에 소규모 텃밭을 조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농촌 마을에 도시민들이 1년 이상 머물 수 있도록 2층 주택과 텃밭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경기도가 한국형 클라인가르텐이라고 소개한 ‘체재형 주말농장’은 양평, 가평 등에 만들어졌는데,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당시 체재형 주말농장을 유치한 양평의 한 마을 이장은 “마을 새마을회가 소유권을 갖고 주말농장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잘 안 됐다. 주택은 비어 있는 경우가 더 많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수리비가 엄청난 부담이 됐다”고 했다. 그는 “주말농장 사업은 접었다. 그때 지어진 집들과 텃밭은 방치돼 있다”고 말했다. 가평의 한 체재형 주말농장에선 소유권을 가진 마을 새마을회가 ‘주말농장’의 운영을 펜션 사업자에게 맡기고, 그로부터 사용료를 받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수도권에서도 도시 텃밭 수요는 높지만 도시 내에 경작할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다. 서울 강서구와 인접한 경기 부천에는 한때 시에서 운영하는 3개의 도시 텃밭 단지가 있었지만, 한 곳은 아파트단지 개발로 2021년 사라졌다. 또 다른 한 곳도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설 계획이다. 한때 도시농업이 이뤄졌던 김포공항 인근의 땅(부천 대장동)은 현재 3기 신도시 공사가 한창이다.

카를스루에에서도 2017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카를스루에시가 공개한 ‘2030년 토지이용계획(FNP 2030)’에 ‘대형 클라인가르텐 단지 3곳을 주거 지역으로 개발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도심에 있는 텃밭들이 사라지거나, 멀리 이전될 위기에 처했다. 이를 막기 위해 텃밭 회원들이 ‘단지 보존을 위한 청원’을 시작했고, 시민들의 지지가 이어졌다. 결국 해당 계획안에서 ‘클라인가르텐 단지를 주거지로 전환한다’는 내용은 삭제되었다.
이어 칼스루에시에는 ‘클라인가르텐 자문위원단’이 공식 발족했고 2020년에는 칼스루에시가 ‘클라인가르텐 확대 계획(KEP)’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기존 클라인가르텐 부지는 원칙적으로 보존하고 추가 부지를 발굴해 단지를 확장한다. 이전이 필요한 경우, 가급적 기존 입지 근처에서 대체 부지를 확보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청원 운동을 주도한 알프레드 뤼튼은 “클라인가르텐이 삶의 질을 높이고 도시 내 생물 다양성을 확대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에 대해 시민들의 공감대가 있었다”며 “특히 환경과 기후 보호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클라인가르텐 보존을 위한 행동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카를스루에시 클라인가르텐협회(BVKA) 회원들은 공공성과 사회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활동을 더 확대하기 시작했다. 텃밭에 벌통을 들이고, 사라져 가는 토종 종자를 많이 심고, 텃밭 구획을 나누는 울타리를 없애고 산책로를 더 넓혔다.
라인슈트란트지들룽 단지에서 텃밭을 가꾸는 콘스탄체 코흐는 “예전엔 울타리가 있었지만, 그걸 없애고 나니 이웃 간 벽도 함께 사라진 것 같아요. 사람들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죠”라고 말했다. 한국의 도시 텃밭과 ‘한국형 클라인가르텐’에는 무엇이 빠져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