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워싱턴, 히틀러 닮아가는 트럼프의 ‘분서갱유’

2025-12-19

‘세계 정치의 수도.’ ‘워싱턴’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생각이다. 나에게 워싱턴은 ‘정치의 수도’가 아니라 ‘박물관의 수도’다. 자연사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은 일단 논외로 하고, 이번 답사와 직접적으로 관심이 있는 ‘역사박물관’만 해도 그 수가 엄청나다. 대표적으로 국립미국사박물관, 국립아메리칸인디언박물관, 국립아프리카계아메리칸역사문화박물관, 스미스소니언 국립라틴계아메리칸박물관, 스미스소니언 미국여성사박물관, 차이나아메리칸박물관 등이 있다. 박물관마다 엄청난 자료를 전시하고 있어 워싱턴에 머문 3박4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입장료까지 무료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박물관 순회 계획을 세우려고 장소를 찾다 보니 라틴계아메리칸박물관과 여성사박물관은 2020년 법이 통과돼 2030년에나 문을 연다고 한다. 다행히 국립미국사박물관 안에 ‘모리나 패밀리 라티노 갤러리’가 마련돼 ‘미국의 라틴계 역사’라는 전시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차이나아메리칸박물관도 내 일정이 문을 여는 요일과 맞지 않아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그곳 중국계 박물관을 보기로 했다.

미국의 풍요 뒤에 숨겨진 비극에 절망

결국 미국사박물관과 3대 소수민족 박물관을 중심으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이번 여행의 다른 글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는 아프리카계는 빼고, 아메리카 원주민과 라틴계 아메리칸 박물관을 소개하고자 한다.

‘원주민의 땅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박물관에 도착하자 나타난 팻말이다. 박물관은 백인들이 오기 전인 400년 전 원주민들이 살던 곳으로, 원래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건물로 들어가자 각 부족을 상징하는 수많은 깃발이 걸려 있어 미 대륙에 많은 부족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 대 국가’, 전시장에 나타난 첫 전시물이다. 인디언의 각 ‘부족 국가’들이 미국이란 ‘백인 국가’와 수많은 조약을 어떻게 맺었고, 파기돼 쫓겨났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정점은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만든 ‘인디언 제거법’이다(뒤의 ‘체로키’ 참조).

영화로도 만들어진 ‘포카혼타스’ 이야기가 충격적이다. 원주민 추장의 딸인 그는 1506년 미국의 첫 식민지로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정착한 백인들을 도와주고 백인과 결혼해 영국까지 진출했다. 미국은 이 이야기를 크게 선전했다. 1924년 백인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백인은 ‘유색 인종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지 않은 코카서스 인종’으로 규정한 법을 만들면서 문제가 생겼다. 버지니아의 최상류층인 포카혼타스 가문이 백인이 아니게 된 것이다. 결국 ‘인디언 피가 16분의 1 이하만 섞인 경우는 백인’이라는 ‘포카혼타스 예외 조항’을 만들었다.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 전시실은 묻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타락한 문명에 때 묻지 않은 원시인의 순수성을 찬양한 개념인 ‘고귀한 야만인’이었는가? 박물관은 원주민 사회도 다른 사회처럼 나름 문제가 많았고, 고귀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라틴계 박물관은 원주민이나 아프리카계에 비해 면적도 작고 전시물도 의상, 음악 등 문화적인 전시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실망했지만, 역사 전시가 분량은 적어도 생각할 것이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히스패닉’, ‘시카노’, ‘라틴계’(라티노) 등 구 스페인계 식민지 출신의 백인 등을 부르는 명칭에 대한 정리인데 이들을 뭐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정답은 여기에도 없었다(여기에서는 ‘라틴계’라고 부르겠다). 이야기는 라틴계가 생기기 이전부터 미 대륙에 살았던 원주민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다음은 스페인의 침공, 앵글로색슨계의 미국 진출과 건국, 이들의 텍사스 진출과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인한 텍사스 등 미국 영토 편입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는 미국과 멕시코가 리오그란데강을 기준으로 영토를 정하면서 이 지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던 인디언들이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이후 텍사스, 캘리포니아 등에 살던 멕시코계는 자기들이 살아온 지역이 미국이 되면서 미국의 ‘소수민족’이 됐다. ‘2등 시민.’ 박물관은 라틴계의 신세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뿐 아니라 리오그란데강 남쪽에서 원래 자기들이 살던 텍사스, 캘리포니아로 들어오는 것은 이제 ‘불법 이민’이 되고 만 것이다. ‘먼로 독트린’을 미국이 몽둥이를 들고 라틴아메리카를 밟고 있는 그림으로 그린 1905년의 만평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이민자에게 완전한 권리를!’ 박물관을 떠나려니, 이민자들의 시위 구호가 내 가슴을 쳤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여러 박물관을 보고 미국의 역사,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 아프리카계의 역사 등을 총체적으로 공부하고 나니 그 충격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도 잔인한 미국의 역사에 절망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누리고 있는 풍요 뒤에 이 같은 비극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중국 닮아가는 ‘트럼프의 미국’에 섬뜩

조그만 희망도 봤다. 그것은 미국이 최소한 자신들을 대표하는 국립 박물관들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어느 정도는 솔직히 인정하고,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면피용’일지 모르지만, 그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미국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 예가 중국이다. 내가 견문이 적어서인지, 중국이 장족(티베트족),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 등 자신의 잘못된 역사를 전시하고 반성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동북공정 등을 통해 역사를 체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중국이 세계의 패권국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손뼉을 치기에는 문제가 많다. 미국도 중국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2025년 다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국립아프리카계아메리칸역사문화박물관과 스미스소니언 미국여성사박물관을 꼭 집어서 포문을 열었다. 그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를 왜곡시키는 분열적 서사”를 바꾸도록 지시하는 한편 트랜스젠더 등 젠더와 인종에 대한 특정 주제의 전시를 금지했다.

1933년 히틀러와 나치스는 “독일의 영혼을 정화한다”며 나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책들을 불태운 분서갱유를 했다. 조지 오웰의 <1984>에는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하기 위해 ‘불온한 단어’들을 사전에서 제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트럼프는 이 일화들이 생각나는 섬뜩한 짓을 하고 있다. 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쿼바디스,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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