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정부가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12일(현지 시간) 예정대로 부과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국내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대미 수출 주요 품목인 자동차 부품 중 20~30%가 철강·알루미늄군에 포함돼 관세를 부과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고율 관세를 앞세워 제조업 부활을 꿈꾸고 있다. 유럽연합(EU)은 TSMC를 포함해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바이 유러피안’ 전략을 통해 유럽의 자동차 산업 부흥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10여 년간 반도체 분야에만 560조 원 규모의 투자를 일으켰다. 일본 정부는 2030년까지 인공지능(AI)과 반도체에 10조 엔(약 98조 원) 규모의 금융 지원과 보조금을 투입할 계획이다.
글로벌 자유무역 시대가 저물고 산업정책이 다시 중요해진 시기가 도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정책도 기존의 도그마에서 벗어나 무역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기업과 수출기업을 지원하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중은행의 기업대출을 독려하고 한국산업은행과 IBK기업은행 같은 ‘공금융’의 자본 건전성을 선제적으로 확충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금융계의 고위 관계자는 10일 “기존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국가별로도 산업정책이 부활하는 상황”이라며 “이럴 때일수록 산업정책의 핵심 수단으로서 금융정책의 중요도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학계에서는 금융권의 지원 규모를 늘리고 방식도 다양화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단순 저리 지원 이외에 지분 투자를 확대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대학 교수는 “첨단기술 연구개발(R&D)을 할 때 정책금융기관에서 지분 투자 형태로 자금을 공급한 뒤 지원 기업에 이후 지분을 되사올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하는 식으로 지원 전략을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며 “중동 지역 국가들처럼 국부펀드 형태의 지원책을 추진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국책은행의 중요성은 더 높아졌다. 올해 산업·기업은행과 신용·기술보증기금은 지난해보다 7조 원 늘어난 247조 5000억 원의 정책금융을 공급한다. 반도체·2차전지·AI를 비롯한 첨단전략산업에는 37조 2000억 원을 투입하고 구조 개편이 필요한 석유화학·철강과 같은 산업에는 31조 원을 제공할 예정이다.
최근 정부는 향후 5년간 50조 원 규모의 첨단전략산업기금을 마련해 핵심 산업에 약 100조 원가량을 공급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도 이날 “(금융이) 생산성 있는 분야로 자금을 배분해 중장기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산업 구조 고도화를 위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당장 산은만 해도 지난해 연말 기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연결 기준 13.75%로 전 분기 말 대비 0.61%포인트나 낮아졌다. 당국이 건전성 유지를 위한 마지노선으로 13%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글로벌 통상 환경 변화에 따른 충분한 자금 공급을 위해서는 자본 확충이 필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기관 지분 현물출자보다도 현금출자 방식을 통해 직접적으로 산은·수은을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산은은 지난 2022~2023년 총 1조 원의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지분을 현물출자받았고 지난해 3월에도 LH 주식을 추가로 2조 현물출자했다. 그러나 현물출자는 현금출자에 비해 레버리지 여력이 약한데다 출자 주식의 가치에 따라 자본건전성이 요동칠 수 있어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의 움직임은 이와 거꾸로다. 지난해 대규모 세수 펑크로 산은과 기은에서만 1조 3000억 원가량의 배당을 받아갔다. IBK기업은행만 해도 배당 성향을 전년보다 2.5%포인트 높인 35%로 결정하면서 총 8430억 원의 배당을 지급했다. 산업은행은 약 8000억 원을 정부에 배당하면서 사실상 15조 원의 대출 여력을 잃어버리게 됐다.
시중은행에 대한 정부의 밸류업 강조도 적정 수준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밸류업 압박에 보통주자본비율(CET1) 13%를 초과하는 자본을 주주 환원에 활용하는 내용의 주주 환원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러나 중소기업 같은 대출은 위험가중자산(RWA) 증가로 이어져 CET1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밸류업을 하기 위해서는 중기 대출을 줄여야 하는 셈이다.
실제로 시중은행들도 위험도가 높은 기업대출을 줄이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예금은행의 대기업 대출은 304조 9000억 원으로 전 분기보다 1조 1000억 원 감소했다. 중소기업 대출의 경우 같은 기간 4조 1000억 원 늘어 같은 해 3분기의 전 분기 증가 폭(11조 9000억 원)보다 축소됐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가계부채 규제를 고려하면 기업 여신 확대를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이라면서도 “RWA가 부담스러운 만큼 신용보증기금이나 지역신용보증재단의 보증부 대출 위주로 취급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