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에 두만강 건넌 소년, 이젠 탈북민 돕죠"

2025-12-08

1990년대 북한 함흥. ‘고난의 행군’은 몇 명이 굶어 죽었는지 숫자가 아닌 말 그대로 고난에 찌든 얼굴들이었다. 배고픔에 쓰러진 이웃, 아사한 할머니와 삼촌,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소년. 그 소년에게 학교와 공부는 사치의 영역이었고 바닷가와 산을 헤매며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 1983년 함흥에서 출생한 이영현 법무법인 이래 변호사의 이야기다. 탈북민 1호 변호사인 이 변호사는 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뼈만 앙상한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이 변호사는 1997년 외삼촌과 쌀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두만강을 건너던 중 외삼촌은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고 홀로 중국에 도착했다. 그 길이 탈북이 됐다. 그는 “중국에서의 5년은 막노동을 하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쳤지만 또 내 인생의 방향을 틀어준 시기였다”며 “한인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잠시나마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게 돼 동경했었다”고 전했다.

2002년 한국에 온 그는 입국 순간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변호사는 “인천공항에 내린 순간 바닥에 주저앉아 몇 분 동안 울었다”며 “한국에 온다는 생각만으로 입국 전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는데 이제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다고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북한 주민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19세에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이 변호사는 두세 살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그는 “마음껏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은 이뤘지만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도 됐다”며 “그러던 중 한 선생님이 ‘북한의 인권을 책임지는 법조인이 돼보는 게 어떠냐’고 조언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도 변호사가 되기 어려운 현실에서 갓 입국한 탈북 청년이 변호사가 되겠다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주변에서도 만류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고 연세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이 변호사는 “법학과 공부는 너무 어려웠고 교과서를 보면 글자 하나하나가 큰 벽처럼 느껴져 1학년 기말고사 성적은 맨 하위권이었다”며 “남들처럼 학원을 다닐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안 돼 방학 때는 삭발을 하고 지인이 소유한 산속의 빈집에 들어가 독학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던 중 로스쿨 제도가 도입돼 경북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하지만 로스쿨의 학업도 역시 너무 어려웠다. 로스쿨 공부는 법학과보다 더 힘들었으나 변호사가 되겠다는 의지만은 꺾지 않았던 그는 4번 낙방, 5번째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7년 차 변호사인 지금 그의 업무는 형사·보험사건을 중심으로 민사·행정·가사까지 폭넓다. 그럼에도 가장 보람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이 변호사는 “탈북민들에게는 법률 전문가가 나 외에는 없는데 그들은 경제적 형편상 변호사를 찾아가기 어렵다”며 “그래서 나는 탈북민들의 법률 문제를 무료로 상담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북한 주민과 인권을 향해 있다. 김정은 정권의 반인도 범죄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려는 활동에도 적극 참여 중이다.

이 변호사는 얼마 전 설립된 대북 인터넷 매체 ‘조선인터넷방송(KIS)’의 대표를 맡았다. 그는 “미국의소리(VOA) 등 해외의 대북 매체들이 축소되거나 폐지되는 상황에서 북한 주민에게 외부 정보를 전달하는 통로가 절실해졌다”며 “KIS는 북한 밖에서 인터넷에 접속이 가능한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북한 내외의 정보를 전달하고 그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KIS는 영리적인 사업은 하지 않으며 순수하게 후원을 통해 운영된다. 후원 계좌번호 등은 KIS 홈페이지에 안내돼 있다.

이 변호사는 “커피 한 잔 값도 좋다. 후원의 액수는 크고 작고가 중요하지 않다”며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정보 접근권을 가질 수 있도록 KIS가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많은 분들이 도와 달라”며 관심과 후원을 당부했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