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국가책략의 ‘3중 딜레마’

벌써 석 달이나 지났건만 중국의 인공지능(AI) 모델인 딥시크가 일으킨 파장이 가시지 않고 있다. 오히려 ‘딥시크 파장’은 AI 국가책략(statecraft)에 대한 논의에 제대로 불을 지핀 모양새다. 국제정치학의 시각에서 봐도 향후 AI 국가책략은 단지 기술 역량을 기르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의 난제도 풀어야 하고 우리 나름의 AI 안보 담론도 세워야 하는 문제임을 깨닫게 했다. 특히 국가역량의 규모나 지정학적 위치, 국제사회적 역할 등에서 ‘중견국’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3중 딜레마’를 고민케 했다.
AI 기술혁신에선 ‘선도전략’과 ‘특화전략’ 중 선택의 문제가 고민
단기론 특화 영역 공략, 장기론 기반 모델 개발의 ‘복합전략’이 답
AI 생태계 전략은 폐쇄형과 개방형 사이에 전략적 입장 설정하고
미·중 AI 안보 갈등 속에서 우리 나름의 ‘적정 안보화’ 원칙 세워야
AI 분야는 ‘규모의 게임’ 논리 작동

첫째, AI 기술혁신 전략에서 ‘선도전략’과 ‘특화전략’의 어느 쪽을 채택하느냐다. 범용 AI 모델인 ‘기반(foundation) 모델’을 자체 개발할지, 외국산 기반 모델을 빌려서 ‘도메인 특화모델’로 응용해서 쓸지의 고민이다.
선두그룹과 경쟁하려면 자체적으로 기반 모델을 개발할 기술 역량이 있어야 한다. 기술을 빌려 쓰면 종속된다. 시험에서도 가중치가 높은 국·영·수 과목을 포기하면 상위권 진입은 어렵다. 사실 여태까지 한국은 녹록지 않은 상황임에도 여러 첨단기술 분야에 도전해 지금의 ‘디지털 한국’을 이뤄냈다. 미·중이 크게 앞서가고 여타 국가들이 아직 뚜렷한 우열을 가리지 못한 AI 분야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기회가 있다.
그러나 국가역량의 규모 면에서 중견국인 한국이 AI 분야 ‘규모의 게임’을 감당하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일개 빅테크 기업의 투자가 한국 전체 투자 규모를 수십 배나 능가한다. 게다가 기반 모델 경쟁은 ‘승자독식’의 논리가 작동하는 분야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접근하다가는 자칫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
딥시크의 ‘가성비 행보’에도 주목
그런데 최근 딥시크의 ‘가성비 행보’는 ‘추격전략’을 효과적으로 세우면 저비용으로도 고성능의 AI 모델을 개발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런 전략은 한국이 잘하는 분야이고 산업화도 이런 정신으로 따라왔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의 관점에서 ‘한국형 AI 모델’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주력 분야에 특화된 소형언어모델(SLM), 온디바이스 AI, 저전력 AI 반도체, 소버린(sovereign) AI 등이 자주 거론된다.
또한 ‘개발전략’을 넘어서 ‘적용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크다. 조선·반도체·자동차·항공·의료 등 산업경쟁력이 있는 분야별로 솔루션을 제공하는 ‘특화 AI’를 개발하자는 것이다. 이는 AI와 제조업을 융복합하는 4차 산업혁명의 구상과도 맞닿는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기반 모델 개발로 선도적 잠재력을 익히면서도 단기적으로는 경쟁력 있는 특화 영역을 공략하는 ‘복합전략’이 답이다. 국·영·수 공부는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지만, 부족한 점수는 암기과목 만점 받아서 메워야 한다.
미국은 폐쇄형, 중국은 개방형 전략
둘째, AI 생태계 전략에서 ‘폐쇄형’과 ‘개방형’의 어느 진영과 연대하느냐다. 이는 비싼 비용을 치르고 미국의 폐쇄형 AI 모델을 계속 써야 할지, 무료로 제공되는 중국의 개방형 AI 모델을 새로 채택할지의 문제와 통한다.
최근 미국은 AI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는 개방형 AI 생태계 전략에서 소스 코드 비공개의 폐쇄형 전략으로 이행하고 있다. 특히 2021년을 거치면서 구글·오픈AI 등이 막대한 투자금 회수와 대중국 견제 등을 목적으로 폐쇄형 전략을 채택했다. 이에 반해 딥시크·알리바바 등 중국 AI 기업들은 개방형 전략을 내세워 도전하고 있으며 이를 일대일로(一帶一路) 선상의 국가들로 확대하고 있다. 최근 국내 AI 스타트업의 상당수도 개방형 모델인 딥시크를 자사 서비스에 탑재해서 쓰고 있다.
그런데 개별 기업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지정학적으로 미·중 사이에 끼인 중견국인 한국이 선뜻 중국발 개방형 모델에 편승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의 대중국 제재가 AI 모델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과 플랫폼 서비스 전반에 걸쳐 가동되는 상황에서 여태까지 유지해 온 한·미 관계 전반의 밀착 기조를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견국 외교 소재로 활용 가능
그렇다고 중국발 개방형 모델을 섣불리 멀리하기도 힘들다. 중국 시장 진출 문제는 고사하고라도 중국 플랫폼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동남아 지역 진출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만약에 우리가 멀리해서 호환이 잘 안 되는 AI 모델을 채택한 중국 기업이 이 지역 시장을 선점하게 되면 이는 일종의 ‘표준의 장벽’으로 작용할 우려가 다분하다.
결국 이는 플랫폼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안으로 웅크리는 미국의 지배적 플랫폼 위에서 한국이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지, 개방적으로 팽창하는 중국 주도 대항 플랫폼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의 문제를 의미한다.
다만 중국발 개방형 모델에 편승하는 것과 ‘개방형 AI 모델 일반’에 가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최첨단 개방형 AI 모델에 의지하면 후발주자라도 저비용으로 유용한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다. 이러한 이점을 살려 미·중이 아닌 여타 동지국가들이나 개발도상국들과 연대할 여지가 생긴다. 특히 자국 역사와 문화를 반영한 AI 모델의 개발을 지지하는 국가들과 기술연대의 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AI 격차 해소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주창하는 AI 규범 외교도 펼쳐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중견국 외교의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전방위적으로 중국 AI 견제
끝으로 AI 안보 담론·규범 전략에서 ‘안보 담론’과 ‘경제 담론’ 중 무엇을 중시할 것이냐다. 중국산 AI를 국가안보 문제로 보고 제재하려는 미국의 행보에 동참할지, 어느 정도의 안전 문제를 감수하고 가성비 좋은 중국산 AI를 도입해 사용할지의 선택이다.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은 경제안보뿐만 아니라 군사안보 논리까지 전방위적으로 동원해 AI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할 것으로 전망된다. 딥시크가 중국 정부의 지침에 따라 알고리즘을 조작하고 검열된 데이터만 학습해 친중 내러티브를 생성한다는 서방 진영의 우려도 흘려듣기 어렵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과잉 안보화’는 경계해야 한다. AI 기술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안전의 위험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그 활용 자체를 완전히 봉쇄하는 것은 경제적 후생 차원에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강대국 오락가락 행보에 중심 잡아야
트럼프 2기 미국의 AI 정책이 초래할 ‘과소 안보화’도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기술혁신과 규제 완화를 강조하며 조 바이든 행정부의 AI 규제 행정명령을 폐기했는데, 이는 그동안 미국이 공들여 온 AI 윤리 규범 형성의 노력을 경시하는 조치로 해석됐다. AI 규제 표준을 주도해 왔던 유럽연합(EU)의 법·정책이 미국 기업들을 겨냥한다며 탈규제의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미국발 ‘과소 안보화’의 행보는 향후 한국의 AI 규제 규범 형성에도 압박 요인으로 작동할 것이며 더 나아가 최근 AI 규범 외교의 장에서 발휘해 온 중견국 리더십을 위축시킬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강대국의 오락가락 안보화 행보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적정 안보화’에 대한 우리 나름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정 필요해서 중국 AI 제품을 규제하더라도 어떤 AI 안보 담론을 원용할지의 기준이 필요하다. 또한 AI 규제 완화를 바탕으로 기술혁신을 추진하더라도 군사적 오남용에 반대하고 ‘인간 안보’의 가치는 지켜야만 한다.
결국 신흥안보 이슈로서 AI 안보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강대국과 차별화되는 중견국 AI 안보 담론의 콘텐트를 창출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제사회를 설득할 규범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AI 딜레마는 국가적 차원의 숙제
요컨대 중견국으로서 당면한 AI 분야의 ‘3중 딜레마’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는 국가책략의 모색이 시급하다. 선도전략과 특화전략을 적절히 복합하고, 폐쇄형과 개방형 사이에서 전략적 입장을 설정하며, 안보 담론과 경제 담론의 유연한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AI 현장의 기업들에 맡겨 놓을 문제가 아니다. 그야말로 개별 행위자들의 전략을 아우르는 국가적 차원의 숙제다. 사실 이들 문제는 경제와 외교·안보 분야에서 드러나는 미래 국가책략 전반의 고민을 응축해서 담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 국가책략의 거시적인 시각을 원용해 AI라는 미시적 문제를 풀어갈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